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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다 Apr 26. 2020

마이 시스터, 마이 시스터

나는 또 언제고 그렇게 언니를 부를 것만 같다

공항에 갈 때면 스무 살의 그 겨울을 떠올린다. 간혹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외국의 공항에서 붙잡힌 사연들을 이야기하며 깔깔대고 서로 놀리지만 나에게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이다.  


스무 살, 생애 처음으로 외국행 비행기를 탔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친 겨울 방학 동안 뉴질랜드에 있는 오클랜드로 떠나게 되었다. 언니가 어학연수 차 그곳에 일 년을 머물 계획으로 떠난 지 육 개월 즈음되었고, 나는 그곳에서 두 달 간의 단기 연수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처음 타보는 국제선 비행기에 열 시간이 넘는 비행, 그리고 첫 해외 체류에 꽤 긴 시간을 머물 생각을 하니 잔뜩 신이 났다. 언니는 그곳에 간 후로 쭉 현지 가족들과 함께 사는 홈스테이를 하다 내가 온다는 소식에 작은 아파트를 빌려 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두 살 터울이지만 한참은 어린 동생으로 나를 보는 언니는 며칠 전부터 매일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일러주기 바빴다. 그중 대부분의 정보들은 흘려버리고 언니가 알려준 집 주소와 핸드폰 번호는 수첩에 받아 적어두었다. 엄마는 내 편에 보낼 볶은 멸치, 콩자반, 구운 김 같은 마른반찬들을 만드느라 출발 전 며칠 동안 분주하셨다.  


보통 어학연수를 가는 경우에는 한국에 있는 어학원을 통해 등록을 했다. 어학원은 숙소부터 학교 등록까지 외국 생활에서 필요한 많은 것들을 대행하여 준비해주는 곳이었다. 언니도 출국 전에 그곳을 통해 준비를 했었다. 다만 나는 언니가 그곳에 있어 내가 들을만한 프로그램이 있는 학교를 알아보고 등록을 마쳐주었다. 그래서 내가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미덥지가 않은 막내가 외국을 나간다고 하니 혹시나 비행기를 갈아타다 문제가 생길까 부모님께서는 조금 더 값을 치르고 직항 비행기 티켓을 끊어 주셨다. 우리 가족 중에 걱정이 없었던 건 떠나는 나뿐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기내식으로 먹은 비빔밥에 체기를 느꼈다. 머리가 아파왔다. 고요한 비행기 속에서 나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승무원에게 약을 부탁해서 먹은 후 한숨 잘까 싶었지만 잠에 들 수 없었다. 와인 한 잔도 소용없었다. 뜬 눈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 마냥 신나기만 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공항에 도착할 때쯤 승무원이 입국 신고서를 나눠 주었는데 대충 보니 별 것 아니었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언니 집 주소와 여권번호를 적고, 방문 목적란에 공부하러 왔다는 체크까지 능숙한 척해두고는 내심 뿌듯해하고 있었다. 뒷장을 보니 가져오지 말아야 할 것 들을 가져왔냐는 질문들인 것 같아 단번에 모두 ‘NO’에 모두 표시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에 마음이 살랑거렸다. 한국과 계절이 반대인 그곳은 여름이었다. 짐을 찾아 입국심사장으로 갔다. 차례가 되어 여권과 입국 신고서를 건넸다. 공항 직원은 나에게 공부를 하러 왔냐고 물었다. 나는 ‘예스’라고 했다. 그는 재차 물었다. 나는 당연히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도장을 찍어 주지 않고는 노려보며 저 쪽으로 가라고 했다. 여권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가 가리킨 쪽을 보니 제복을 입은 덩치 큰 마오리-뉴질랜드 원주민-족 두 명이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그들은 어느 방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밝고 텅 빈 공간이었다. 꽤나 당황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에 귀를 쫑긋 세웠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간간히 나에게 질문을 몇 개 건넸지만 알아듣지 못했고, 만들 수 있는 문장도 떠오르지 않아 ‘마이 시스터’라고만 반복해 말했다. 그들은 듣지 않는 것 같았다. 한참을 방 안에 붙잡혀 있었다. 공항으로 나를 데리러 나오기로 한 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도 같았지만 왠지 울면 안 될 것 같아서 꾹 참고 있었다. 언니에게 전화를 하려고 한국에서 가져간 핸드폰을 꺼냈지만 그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소식을 전할 길도 없었다.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으라고 하기에 언니가 알려준 전화번호를 적고 ‘마이 시스터, 마이 시스터’라고 했다. 


한참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입국 허가 도장을 받고 나니 이제 밖으로 나가나 보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또다시 붙잡혔다. 밖으로 나가는 문턱에 있던 덩치 큰 직원이 내 캐리어를 가리키며 열어보라고 했다. 내가 캐리어를 열자 그는 뒤적여보더니 엄마가 챙겨준 마른반찬들을 찾아 꺼내 들었다. 신고서 뒷장에 대충 읽고 표시했던 것들이 음식물을 반입하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이었던 것을 그때 알았다. 벌금이 삼백 달러라고 했다. 내가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릴 것 같았는지 눈감아 주었다. 난리 끝에 공항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언니와 상봉했다. 언니는 공항 밖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고, 공항 직원에게 전화를 받고 난 뒤에야 내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는 안도하고 있었다. 삼 개월 동안 체류가 가능한 관광 비자로 입국하는 내가 공부를 하러 왔다고 표시를 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었다. 고생했다며 나를 꼭 안아주었고, 언니 품에 안겨 펑펑 울어버렸다. 두 살 터울이 날 뿐이지만 나는 한참은 어린 동생이었다. 


가끔은 철이 없어 보이는 언니일지라도, 나는 또 언제고 그렇게 언니를 부를 것만 같다.

마이 시스터, 마이 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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