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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다 May 26. 2020

떠나지 못하는 날들을 위로하며

그 여행의 평화로움을 기억하기

가만히 앉아 오래된 사진들을 열어보다가 그 여행의 평화로운 시간들을 떠올렸다. 마음처럼 훌쩍훌쩍 떠나지 못하는 날들을 위로하기 위해 우리는 사진을 남기나 보다.




여름휴가 전 날이었다. 밤 열 한시가 넘어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와 짐을 챙겼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그 해, 쉴 틈 없이 일한 뒤에 얻게 된 휴가에 피곤함도 잊고 밤이 깊도록 가방에 이것저것 챙겨 넣었다. 친구와 휴가 날짜를 맞춰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일주일간의 여행이었다. 다음날 묵직한 배낭을 둘러메고 출근을 했다. 일과가 끝나자마자 서울역으로 가 친구를 만났다. 서울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통영으로 가는 것이 첫 번째 일정이었다. 8월 초의 서울역에는 늦은 시간에도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새벽 세시 반, 잠이 들었다 깨니 부산에 도착해 있었다. 광안리 해수욕장 앞 찜질방에서 씻고 나와 새벽 바다 냄새를 맡았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부산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해 불러내 커피 한 잔을 함께 마셨다. 시간에 맞춰 통영행 버스를 탔다. 부산, 통영, 경주를 도는 일정 중에 통영은 친구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였다. 이미 두 번을 다녀온 곳이지만 또 찾아갈 만큼 좋았기 때문에 이번 일정에도 꼭 넣기로 한 것이었다. 통영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맛집 몇 곳을 찾아 놓았고, 평이 좋은 게스트하우스 한 곳을 예약해두었다. 통영 터미널에 도착해 시내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시장 근처에 내려 예약한 숙소를 찾았다. 통영 시내는 작아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비가 온다고 했는데 날이 맑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오니 허기가 느껴져 중앙시장으로 가서 회를 먹기로 했다. 세 마리에 삼만 원인 줄돔에다 인심 좋은 아주머니께선 한 마리를 더 얹어 주시고 멍게와 해삼까지 덤으로 받았다. 초장집에 앉아 기다렸다. 회가 나오자마자 우리는 금세 먹어 치웠다.


동네가 조용해 일렁대는 파도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내일 비가 내리려는지 후덥지근했다. 우리는 산책 삼아 동피랑 마을로 향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하하하’를 보고 난 후에 한 번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밤에 오니 낮과는 달리 달빛과 가로등에 비치는 벽화가 운치 있었다. 벽화와 계단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랐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청년 여럿이 모여 찬송가에 맞춰 율동을 맞추고 있었다. 음악과 그들의 실루엣이 조용한 그곳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건너편에 멀찍이서 알알이 반짝이는 조명들이 아름다웠다.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기가 아쉬워 ‘작은 술집’ 이란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 이름 그대로 작고 소박한 가게였다. 우리는 맥주 한 잔씩 주문했다. 옆 테이블의 시끌한 젊은이들은 동네 단골들인지 원하는 노래들을 익숙하게 음반으로 찾아 틀었다. 주인아주머니도 동무들과 한잔하는 중인 듯 보였다. 우리는 사람 구경을 하느라 어느새 밍밍해진 맥주를 마저 비웠다.


숙소는 여섯 명이 함께 쓰는 공간으로 샤워실이 하나뿐이라 씻으려면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방에는 옥상과 연결된 문이 있었는데 기다리는 동안 바람이나 쐴 겸 해서 나가보았다. 옥상에 놓인 나무 벤치에 친구와 말없이 앉아 있는데 귓가에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의 노랫소리가 조화롭게 들려왔다. 우리는 숨은 청중이 되어 그들의 하모니를 감상했다. 친구가 옆에서 낮에 들린 문구점에서 산 비눗방울을 불었다. 애처럼 그런 걸 왜 사냐고 타박했는데, 방울들이 몽실몽실 낮게 떠 있다가 이내 터지는 걸 보고 있자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내일은 정말 비가 오려나보다.


아침엔 정말 가랑비가 내렸다. 빗속을 걷는 일은 가장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이지만 왜인지 통영에서는 그마저도 좋았다. 우산을 쓰고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천천히 오르던 남망산 조각 공원에 가는 길도, 케이블카를 타고 높이 올라갔지만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내려온 미륵산도,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려 들어간, 액자처럼 바다를 가득 담고 있던 커다란 통유리 창이 있는 ‘로피아노’ 카페도, 선명한 오렌지색 피케셔츠를 입고 커피를 내리던 멋쟁이 중년의 사장님도.




어딘가 낯선 곳에서 여행자가 아닌 채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곳은 조용한 작은 마을이면 좋겠고, 사람이 적은 곳이 좋겠다. 산과 바다가 있으면 좋겠고, 유명한 맛집과 카페는 없어도 가끔씩 근처에 장이 서는 곳이면 좋겠다. 차 없이, 오래도록 걷기에 좋은 곳이면 좋겠다. 방 안에 있어도 창문을 열면 싱그러운 냄새가 났으면 좋겠고, 길고양이들이 자주 놀러 오는 마당이 있는 집이면 좋겠다.


사진 몇 장으로 시작된 여행의 기억 덕분에 오늘 하루도 고요하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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