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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다 Mar 02. 2020

생각대로 안 되는 건 참 근사한 일인 것 같아요

내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실패였다

생각대로 안 되는 건 참 근사한 일인 것 같아요!



무심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앤(Anne)처럼. 쾌활한 낙천가, 한 치 앞을 모르는 세상에 덤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 탐험가처럼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짜릿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저는 낙천적이에요."라는 말을 억지로 꺼내 낯부끄럽게 나를 소개한 적도 더러 있었다.



내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실패였다. 계획대로 실천해나가는 성취를 임무로 여겼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명언을 두고도 나는 실패 같은 어머니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줄곧 그래 왔다. 받아쓰기에서 하나를 틀린 90점짜리 시험지를 받고서는 끔찍했고, 수학 성적이 갈수록 떨어지다가 수포자가 되어버린 것도 그랬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을 땐 지원했던 다른 학교는 합격자 발표도 확인하지 않고 이불속에만 파묻혀 있었다.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실은 뒤에서 나를 욕하기도 했고, 다니던 회사에서 정해진 날짜에 급여를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스물여덟에 결혼하겠다 장담하던 내가 그 나이를 훌쩍 넘겼다. 성실한 계획가는 많은 것들에 실패했고, 그것들은 근사하지 않았다. 속상함, 좌절감, 절망감과 배신감, 억울함과 실망감, 우울함 같은 감정들이 곧 실패로 귀결되었다.



받아쓰기를 틀렸을 땐 속상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수학 성적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좌절감이면 되었다. 원하던 대학에 떨어졌던 건 절망이었고, 친구가 내 험담을 할 땐 배신감을, 뜬소문이 돌았을 땐 억울하다고 말했으면 됐다. 나는 그 감정들을 말로 뱉어내지 못하고 실패자가 되기를 선택했다. 어두운 마음은 삼켜내는 것이 선(善)이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루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을 읽고, 때로는 버지 윌슨이 쓴 앤의 어린 시절을 읽는다. 나는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다고, 고통의 검은 구름에 뒤덮였다고 말하는 앤의 이야기. 내 곁에 앤이 있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인 것 같다. 생각대로 안 되는 건 참 근사한 일이라 끝끝내 말하지 못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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