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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밤이 Aug 02. 2023

누구에게나 있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들

[비밀의 언덕] 밟고서야 오를 수 있는


알아야 할 것들과 알려져야 할 것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행해지는 솔직한 마음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야 마는 진실을 자양분 삼아 인생의 줄타기는 점점 균형감을 찾는다.


엄마아빠 사이에서 무던히 인정받고 싶던 96년 봄날의 5학년 소녀 명은이에게서 그때 그 시절 이름 모를 수치감과 인정욕구에 목말라있던 우리의 비밀스러운 모습들이 비친다.


명은이는 늘 가족에게 자신을 봐달라고, 잘해온 것들은 인정해 달라고 갈망한다. 인정의 갈망만큼 기대를 저버리는 가족. 그래서 커져버린 가족에 대한 미움. 그러나 그 미움의 크기만큼 명은이에게는 죄책감이라는 그림자가 큼직하게 뒤따르지만 아직 아이에게는 그림자를 뒤돌아볼 만큼 여유가 있지 않다.


새벽부터 일하고 온 엄마는 분리수거를 할 에너지조차 없다. 환경파괴를 생각하지 않는 그런 엄마를 명은이는 나쁘게 몰아간다. 언제나 자신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지만 늘 제대로 된 출근조차 하지 못하는 아빠를 무능력하게 본다. 언제나 엄마말을 들어주는 것 같지만 정작 친구에겐 그런 대화에 대해 싫은 티를 내며 뒷말을 일삼는 오빠는 뻔뻔하다.

피가 섞이지도 않은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언제나 명은이 편이다. 명은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서 명은이는 집을 나와 할아버지와 삼촌 곁에서 가족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글로 써내리고, 그 글은 곧 지역신문 최우수상으로 뽑히고 신문에 공개될 예정이다.


그러나 명은이는 그 솔직함으로 얻을 수 있었던 큰 영광을 뒤로한 채, 자신의 마음을 비밀리에 숨기기로 한다. 명은이는 어느덧 솔직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솔직함이 주는 자유의 영광을 맛보았으니 이제 자기의 마음보다 타인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다루게 된다. 명은이는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됐고 알려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리고 글로 쓰지 않아도, 직접 표현하지 않아도 젓갈을 듬뿍 담는 엄마의 미소에서 그 마음을 느끼게 됐다. 명은이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직의 성장에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수평의 성장으로 확장해가고 있었다.


수치심, 인정, 동경, 질투, 솔직함, 진실, 이야기.. 어떤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성장통의 언덕


어릴적 나는 명은이처럼 예민한 아이였다. 환경 파괴를 우려하는 명은이처럼 자원낭비를 우려하던 나는 초등학교 2학년때 친구집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내내 켜져있는 것을 보고 전기낭비를 우려하여 코드를 빼버리던 아이였다. 거기에 운전기사를 하던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가시고 저녁에 들어와 말없이 술 한잔 하기만 하던 무뚝뚝하던 분이었고 삼남매를 키우느라 둘째인 나를 돌볼만큼 여유가 없던 엄마의 관심에서 나는 늘 소외된 침묵의 아이였다. 명은이처럼 똑부러지는 아이였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누구보다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에 친구 사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겨우 다닐수 있었던 태권도장의 도복을 교복처럼 매일 입고 다녔고, 그 외의 옷은 사촌언니와 우리언니를 거쳐 물려내려온 헌 옷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 도복만 입고 다니는 내가 굉장히 수치스러워 소심한 성격은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다. 삼남매를 키우며 각종 부업을 하고 있는 엄마의 인정은 사치였고 예쁜 도복을 입을 수 있는 걸스카우트 친구들을 동경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를 질투했고 화가 나면 오히려 입을 꾹 다물었다. 엄마는 솔직하게 말해 보라 하지만 엄마의 다그침은 나의 입을 더욱 묵직하게 만들었고 내 진심을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한 채 예민한 성격이 낮은 자존감으로 연결되는 학창시절이 이어졌다.


나란 존재에 대해 존중 받지 못했던 기억 저편을 글로 옮겨 보려 마음 먹기도 했지만, 내 슬픔의 글이 가족에게 행여 슬픔의 화살로 가슴에 꽂힐까 망설이고 있는 중에 5학년 명은이의 '원고지 회수작전'은 36살의 나에게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상처받은 명은이의 마음은 어떡하나요?


자기 존재의 표창인 글짓기대회 최우수상을 받았지만, 상처받을 가족들의 마음이 먼저 떠오르는 명은이를 바라보며 가족이라는 구성과 나라는 존재 사이에서의 경계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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