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알료샤>와 <유서의 일부로부터/다 짊어질 수 없는 무거운 짐>
톨스토이가 하루 만에 완성했다는 단편소설 <단지 알료샤>. 주인공인 알료샤는 어릴 적 우유단지를 깨트려 친구들에게 단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그가 열아홉이 되던 해 아버지는 그를 상인의 하인으로 보냈다. 알료샤는 그곳에서 시키는 많은 일을 불만 없이 처리하면서 늘 미소 지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나고 식모 우스티냐와 사랑에 빠졌는데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을 포기하고 주인집의 지붕을 수리하다 떨어져 사흘 만에 사망하고 만다.
"뭐, 아무 생각도?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잖아. 때가 되면 내가 결혼을 시켜줄 거야. 이 읍내의 걸레가 아니라 너한테 어울리는 결혼을 시켜줄 거라고."
아버지는 오래 이야기를 했고 알료샤는 그 자리에 서서 한숨만 쉬었다. 아버지가 말을 마치자 알료샤는 미소를 지었다.
"뭐 그 일은 그냥 없던 걸로 할 수 있겠네요."
"그렇지"
아버지가 가고 둘만 남자(우스티냐는 문 뒤에 서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을 다 들었다) 알료샤가 우스티냐에게 말했다.
"우리 계획대로 안 될 것 같아. 다 들었지? 아버지가 화가 나서 허락을 하지 않으려 하네."
우스티냐는 앞치마에 대고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알료샤가 말했다.
"쯧. 쯧, 아버지 말을 들어야지. 그 일은 없던 걸로 해야 할 것 같네."
그날 밤 상인의 부인이 알료샤를 불러 덧문을 닫게 하면서 말했다.
"그래, 네 아버지 말대로 그 터무니없는 생각은 버릴 테냐?"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알료샤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다가 울기 시작했다.
...(중략)
그는 별 말이 없었다. 그냥 계속 물을 달라고 했고 뭔가에 아연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뭔가가 그를 화들짝 놀라게 한 듯했고, 그는 두 다리를 뻗고 죽었다.
조지 손더스는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알료샤의 행위를 "명랑한 순응"으로 표현했다. 그는 집에서도, 주인집에서도 불합리하게 요구하는 많은 일을 처리하면서 늘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와 주인에게만 순응하며 살았던 삶을 후회하는 듯했고, 자신이 선택한 시간들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하며 원치 않게 짧은 인생을 마무리한다.
명랑한 순응. 나 또한 명랑하게 순응했던 삶이기에 이 단어가 머릿속에 또렷하게 박혔다. 원치 않는 상황에 놓였을 때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겨보자는 마음으로 가기 싫은 회식자리를 꿰차고 앉아 지루한 이야기에 즐거운 척을 해보기도 하고, 불합리하다고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음을 먼저 찾아 이 정도면 퍽 괜찮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문제는 '그 안'이라는 것이다. '그 안' 자체가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이었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일까? 순응하는 모습은 타인에게 칭찬 받겠지만 결코 나를 위한 최선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나를 갉아먹는 시간들을 외면한 채 감당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정말 연약한 사람입니다. 나는 반항이라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나의 모든 것은 그저 복종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며 칭찬해 주더군요. 착하다고 칭찬해 주더군요.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게 싫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점점 더 고분고분 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나의 우유부단함을 슬퍼하면서도 점점 더 우유부단해져 갔습니다. 나는 애통했고 헛된 노력만을 계속해왔습니다. 나는 적이 생명을 달라고 하면 순순히 바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겁니다.
...(중략)
타인에게 칭찬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의 피를 짜내고 살갗을 깎아내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이토 노에의 <유서의 일부로부터>라는 편지 형태의 유서글에서 나오는 화자는 '우울한 순응'을 하던 23살의 선생님이었다. 저자 이토 노에가 졸업하고 나서도 6~7년간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던 그녀는 어릴 적부터 말 잘 듣는 아이로 살아오면서 착하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많은 학생을 상대로 하는 직업을 선택한 후엔 자신의 의지대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과의 생각 차이로 인해 더욱 괴로움을 느낀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 생각을 부단히 안으로 틀어박아 온 결과,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순 있었으나 그녀는 오히려 그로 인해 내면에 생각의 괴리에 따른 괴로움이 생겼고, 그 괴로움을 벗어날 방법으로 순응적인 자신을 바꾸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다.
이 편지글을 자신의 생각으로 해석한 이토 노에 에세이 <다 짊어질 수 없는 무거운 짐>에서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생애는 타인의 생각만 배려하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그것에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을 주장하지도 못하고 끝이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겨우 자신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얼마나 무의미한 생인가요. 자신을 되찾았다고 말해봤다 그저 타인의 의사를 거절하는 일뿐이었을 텐데요. 자신을 되찾았다고 생각한 순간에는 이미 생명은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정말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녀 자신이 말한 대로 나도 그녀를 겁쟁이에다가 비겁하며 패기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돌아볼 때, 비겁하더라도 패기가 없더라도 그녀만큼 정말로 지나치게 착실히 괴로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나는 마음이 연약하더라도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을 속일 수 없었던 정직함에 대해서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괴로워하던 이름 모를 그녀는 집 앞 저수지에서 발견됐다.
자유를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던 죽음으로 건너간 우울한 순응자 그녀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며 진정한 삶을 뒤늦게 깨달은 명랑한 순응자 알료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강한 사람으로 살아주세요
때 되면 해야할 과제들이 나열되는 한국의 문화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 속에서 나 다운 삶을 살아갈 힘을 길러보기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