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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영화에서 연극의 향을 맡다

(feat. 원경)

by 윌버와 샬롯

실존 인물이나 배경이 깔린 영상물을 본 후 다시 그 사람이나 사건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정보를 찾아보고자 하는 행동을 유발한다면 그 작품은 분명 좋은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어제 최종회를 했던 드라마 '원경'도 그런 유이다. 이방원의 태종은 알고 있었지만 그 옆에 원경왕후라는 인물의 존재는 여태 몰랐었다. 더구나 그녀는 우리들의 완벽한 왕, 세종의 어머니이지 않은가! 물론 드라마는 팩트와 상상의 적절한 조화로 만들어졌을 테지만, 욕망의 남자 왕 뒤에 대단한 걸크러쉬 왕비님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매료된 것도 사실이다. 한뜻을 갖고 절대적인 동지로 시작한 관계는 거대한 권력 앞에 애증을 가지며 한 세상을 같이 살았지만 결국 뜨거운 회한의 전우애 같은 사랑으로 끝나는 최종회는 꽤나 감동적이었다. 어찌 됐건 천하의 왕과 왕비라는 그들도 결국 여느 부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눈물 또르르 흘리며 공감이 꽤 됐던 것도 같다. 드라마 '원경'은 고려와 조선을 넘나들며 보여준 진취적인 여성 원경왕후를 내게(나만 몰랐나?) 알게 한 것만으로도 드라마로서의 그 가치가 충분함을 인정해 주고 싶다.




유사한 반응으로 아침에는 낯선 제목의 영화를 봤다. 꽤나 긴 제목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잘 아는 그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맞으며 그와 '나디아 연대기'의 작가 C. S. 루이스의 만남과 그 둘의 대화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두 사람의 무신론과 유신론에 대한 토론의 내용이 영화의 주된 내용인데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어, 이건 연극적 요소가 다분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레카! 알고 보니 원작이 희곡이었다. 더구나 한국에서도 공연이 된 작품이었다. 원작인 희곡을 읽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찾아보니 번역서가 보이질 않아 아쉬웠다. 이 영화에서 프로이트로 분한 앤서니 홉킨스가 루이스 역으로 다른 영화에도 출연했다는 사실이 또 흥미로웠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인데. 신의 계획이라니, 터무니없잖소.


종교는 과학의 자리를 남겨두는데, 왜 과학은 종교의 자리를 거부하는 거죠?


그렇다, 영화는 '위대한 지성'들의 대화를 보여주고 한 것이 아니라 지성들의 '위대한 대화'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김형욱, 오마이뉴스)


이 영화의 감탄과 백미는 대화다운 대화, 토론다운 토론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론적인 척을 두고 있지만 두 지성인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존중하며 경청한다. 다른 신념을 갖게 된 이유를 영화는 두 사람의 과거와 삶의 배경을 조명함으로써 설명하고 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 그들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인생을 마주해 보니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위급할 때마다 찾는 '엄마'에게 비는 나의 아이러니만큼이나 이해가 되기도 안 되기도 했다.



우린 오류를 오가며 온전한 진실을 발견한다.


프로이트는 한 권의 책을 루이스에게 선물하며 긴 담론을 마친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책을 펼친 루이스는 첫 장에 프로이트가 쓴 문장을 발견하며 미소를 짓는다. 이 말이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오류를, 나만의 편협함을 언제든 인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스스로가 끊임없이 의심하며 검증해야 함을 요즘의 어지러운 세태에 새겨야 할 말이기도 한 것 같다.


오랜 구강암으로 고통받아 친구인 의사를 통해 자살을 택한 프로이트, 그의 딸 안나, 기독교적인 작가로서의 루이스를 이번 영화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됐다. 그들을 다시 보게 한 한 편의 영화는 다른 책으로 그리고 다시 연극으로 관심을 뻗게 한다. 괜찮은 영화는 이렇게 하루의 오전을 꽉 채우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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