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한달살기, 그 환상에 대해서

여행지에 대한 환상이 여행에 미치는 영향

by 헤이두

발리 도착 전, 나에게 발리란


발리하면 시기별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발리가 인도네시아 섬 중에 하나라는 사실도 알기전, 처음 '발리'라는 단어를 인지했을 때는 신혼여행의 성지

그리고, 그 이후엔 마음을 가다듬고 수행하기 좋은 요가의 성지

그리고, 그 다음엔 서퍼들이 사랑하는 서핑의 성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에 가려고 준비할 때 즈음엔 요즘 유행인 한달살기의 성지


아무튼 여기에 더해,

발리는 많은 연예인들이 살러가는 곳이기도 했고

다른 동남아 여행지 대비해서 항공료, 숙박료, 물가가 비싼 곳이기도 했다.


이런 발리에 대한 모든 정보들이 머리 속에서 합쳐졌고,

워케이션으로 어딘가 한달살기를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발리가 떠올랐다.

당시 나에게 발리는 그러니깐.. 한달살기하면서 할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고 그러면서도 심신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으며, 동남아 특유의 그 푸릇푸릇하고 파랑파랑한 분위기를 한껏 즐길 수 있고 그럼에도 다른 동남아 보다는 조금 잘 정돈된(-항공료와 체류비가 좀 더 비싸니깐) 그런 뭐 말하자면 지상낙원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건 '잘 정돈된'이다. 보통 여행지의 체류비를 결정하는 건 해당 지역의 생활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다른 동남아 대비 체류비가 비싸다는 건 곧 생활 수준과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라는 논리로 연결이 됐으니깐. 게다가 인도네시아가 주변 국가대비 GDP도 높은 편이지 않은가?


주변에 발리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상당수가 '칭송'에 가까운 추천을 하자 내 머리 속에서 발리에 대한 환상은 부풀어만 갔는데... 그런데 실제로 마주한 발리는 내 상상과는 다른, 전혀 다른 곳이었다.

실망감이 극에 달했을 때는, 발리에 대해 칭송하는게 일종의 유행병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들이 좋다니깐 나도 좋아야 할 것 같은 그런?



발리에서 느낀 발리


발리에 대한 환상은 정확히 도착과 동시에 덴파사르 응루라이 공항에서 깨졌다.

발리에 도착해서 마주한 응루라이 공항은 그냥 동남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허름한 작은 공항이었다.

(아, 근데 출국장은 또 다른 모습이다)


공항을 나서니, 동남아 여행지가 으레 그렇듯 수많은 택시 드라이버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아무데서나 피워대는 담배와 담배 연기(나도 흡연자지만), 높은 습도가 순간 불쾌하게 다가왔다.


서핑샵에서 보내준 드라이버의 차를 타자 묘한 냄새가 났고,

공항에서 첫번째 목적지였던 꾸따까지 가는 도로의 교통체증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상했다. 왜냐하면 동남아 여행을 가면 보통 이정도는 각오를 하고 특유의 동남아 냄새가 여행에 대한 설렘을 더해주곤 했는데 말이다. 왜 다른 곳에서는 조금도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좋았던 상황들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다가왔을까.


발리에 대한 첫번째 실망은 도로, 정확히는 인도였다.

잠시 다른 얘기로 가서 내 여행 스타일에 대해서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여행할 때 이동 수단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20대 초반 어릴 때는 돈이 부족하니 아끼느라 그랬고, 그게 습관이 되자 자동차나 지하철같은 이동 수단을 쓰지 않고 무작정 걸을 때 우연히 마주한 광경이 좋았다. 유명한 여행 포인트가 아니라 내가 그냥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나만의 것이라는,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남들은 못보고 나만 본 풍경‘ 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도보 한시간 내외 거리는 웬만하면 걷는 걸 선호한다.

나한테는 목적지 뿐 아니라 걷는 그 거리도 다 여행의 일부니깐.


그런데, 발리는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같은 여행자에게 거의 최악에 가까운 곳이다.

여기서 내 비교 대상의 신뢰성을 위해 그동안 여행으로 방문해본 동남아 여행지를 나열해보자면,

방콕, 치앙마이, 푸켓, 쿠알라룸푸르, 싱가폴, 코타키나발루, 하노이, 호치민, 방비엥, 루앙프라방, 보라카이, 바콜로드 등등. 모든 국가와 도시의 생활 수준이 다르고 그에 따른 기대치도 다르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발리에 대한 기억이 가장 좋지 않다.

퇴근 시간 즈음.. 발리에서 흔한 풍경

일단은 인도가 거의 없다. 보통은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사람이 뒤섞여 지나다닌다.


차선이 있는 도로에는 종종 인도가 있긴한데 땅이 꺼져 생긴 구멍이 너무 많고,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바로 들어가야하는 상점이나 집이 바로 차도와 연결되어 있어서 턱이 엄청 많다. 조금 과장하면 열걸음에 한번은 턱이 있다. 그렇다보니 길을 걸으면서 휴대전화를 보는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옆사람과 대화하면서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구멍에 발이 빠지거나 턱에 걸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발리는 사람보다 차가 먼저다.


그리고, 도시가 계획된 도시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네모네모로 연결되는 우리나라와 달라 발리는 좁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보면 막다른 길을 마주한다. 곧, 길을 잘못 들면 다시 돌아가야한단 얘기기도 하고, 직선거리로 얼마 안되는 길을 삥~~~~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모든게 하나로 합쳐지자 발리는 걷기에 너무나 까다로운 곳이 되고 말았는데,

이번 한달살기에서 아침 러닝까지 계획한 나로서는 너무 고통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두번째 실망은 음식이었다.


이전 동남아 여행이 오히려 독이 됐을까? 태국에서 베트남에서, 3천원도 안되는 싼값에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먹었을때 느꼈던 감탄의 기억은 발리에 대한 기대를 크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먹었던 나시고렝이나 미고렝도 너무 맛있었으니깐. 볶아서 맛없는건 별로 없기도 하고.


발리에서 지낸 한달동안 노점부터 일인당 10만원이 넘는 나름 비싼 식당까지 골고루 경험해본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를 하자면.. 발리 사람들은 손맛이 없다. 그리고, 발리 사람들은 참 튀김을 못튀긴다.

발리에서 가장 많이 먹은 메뉴

유명한 인도네시아 전통 음식인 나시고렝, 미고렝은 대부분 짰고, 나시캄푸르는... 맛이 없었고,

고기는 그저 고기 였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고기 꼬치인 사테를 제외하고 먹을만한 발리만의 음식은 없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어디를 가도 먹을 수 있는 피자와 햄버거가 주된 메뉴가 되었다.


내가 발리에서 먹었던 가장 맛있는 음식은 지중해식 레스토랑에서 먹은 문어요리였고,

가장 많이 먹은 메뉴는 피자였다.


마지막은 발리밸리였다.

발리밸리는 나쁜 수질 때문인데, 이정도 각오도 안했냐고 하면 아니다 나도 각오는 했다.

발리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에서 많이 나오는 얘기기도 해서, 나름 샤워 필터도 챙겨갔다,

다시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나는 일년에 한번 아플까말까한 아주 강력한 면역력 보유자다.

(그래서 팀원들이 아파서 쉬는 것도 머리로만 이해한다)


그래서 당연히도 나는 내가 아플지 몰랐다.

여행을 좋아해서 여러 국가를 다녔고, 한 10년쯤 전에 20일 정도 동남아 배낭여행도 했고, 75일동안 유럽 배낭여행도 했다. 일상에서 아픈적이 없듯이 여행지에서도 아파본적이 없다. 물갈이도 물론 해본적이 없다.

당연히 음식을 가려 먹는 타입이 아니고 깔끔하지도 꼼꼼하지도 않다. 왜냐면 아주 어릴 때, 초등학교 시절을 제외하고 장염에 걸려본적이 없으니깐 딱히 조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난 그냥 건강하다.

고통의 순간이 지나간 뒤에.. 태어나서 처음간 응급실 - 발리응급실 신기해서 신남

그런 내가 여행 6일째 되는 날 발리밸리라고 불리는 장염에 걸렸다.

하루는 고열에 시달리고 이틀은 설사를 했고, 또 이틀은 간헐적으로 배 위쪽이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아플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발리밸리 증상에 비하면 나름 경미한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30일 여행 중 5일을 숙소에서 지냈다. 증상이 처음 발견되는 날 꾸따에서 우붓으로 이동하는 날이었고 우붓에서 지낸 기간은 5일이다. 우붓에 있던 5일을 꼬박 아팠다.


내가 장염에 걸렸단 사실이 어이가 없을만큼 믿기지 않았는데, 문제는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단 거다.

그것도 새벽 2시 반에 출발하는 일출투어가.


결국 응급실에 가서 수액을 맞았다.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



돌아와서 돌이켜보는 발리


발리는 어떤 곳일까? 다녀와보니 더더욱 발리라는 여행지에 대해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30일을 보내고 나서 생각해도 아직 좋은지 나쁜지 쉽게 판단하기가 힘들다.


다른 동남아 도시들하고 비교 했을 때, 발리의 상황이 특별히 더 안좋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 뭐가 그렇게 발리에 대한 실망을 느끼게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결국 처음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내가 만들어낸 발리에 대한 환상.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그 진리.


발리에서 한달을 돌이켜보면 당연히 굉장한 행복감을 느낀 순간도 있다. 발리에 대한 환상을 만들었던 여러 요소들 중에 실제로 겪으면서 좋았던 것도 있었다.


내가 이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은 건, 나처럼 발리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다.


발리는 지상낙원이 기다리고 있는 환상의 섬이 아니다.

그치만 분명히 발리는 여행하기에 충분히 매력이 있는 도시이다.


그러니깐, 누가 나한테 발리에 대해서 묻는다면 내 대답은,


가봐, 발리는 겪어 봐야 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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