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차 직장인의 결심
직장인에게 열흘 이상의 장기 여행이란 꿈만 같은 이야기다.
휴가를 길게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고,
휴가를 낼 수 있다고 해도 신혼여행이 아닌 이상 내 업무를 다른 팀원들에게 떠맡기고 가는 용기를 내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이 준 수많은 나쁜 점에도, 내가 누리고 있는 혜택 중 하나가 재택-출근 하이브리드 근무이다. 그리고, 꼭 누리고 싶은 혜택이 우리 회사에 있는 1년에 한 번 한 달 재택이 가능한 제도이다. 그런데 이 한 달 재택은 사용이 쉽지 않다. 이왕 한 달 동안 재택을 한다면 해외로 나가고 싶고 그렇게 되면 항공권부터 숙박비, 식비까지, 생각보다 한 달간 집이 아닌 곳에서 생활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 돈을 들여서 해외에 가서 8시간은 일을 한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안 가는 게 낫다'라는 결론이 난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도 해외에 집이 따로 있는 외국인이 아니면 사용한 사례가 거의 없다.
이걸 내가 해보기로 했다. 왜냐면 심통이 났으니깐.
일주일이상 해외는 고사하고 국내 여행을 가본 지가 언제인지도 기억조차 나지 않고, 최근 3년 동안을 회사일에 집안일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게다가 작년 3월에는 큰 마음먹고 끊은 파리행 비행기 티켓도 일 때문에 취소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바로 올해 5월 연중에 유난히도 휴일이 많은 그 달의 어느 출근한 날, 내 주변 친구부터 지인까지 상당수가 그날 여행을 갔다. 나만 홀로(팀원들이 있긴 했다) 남아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도 어디든 가야만 했다.
결국 그날 충동적으로 발리행 티켓을 끊었다. 기간은 한 달. 그동안 못 갔던 것과 매해 휴가를 다쓰지 못했다는 보상심리, 그리고 올해 나에게 주어진 36개의 휴가가 심통 난 내 머리에 불을 지폈다. 동기도 충분했고 총알도 충분했다. 내가 혹여라도 생각을 바꿔 번복하는 일이 없도록 취소가 불가한 티켓을 끊어버렸다.
직장인에게 해외여행을 취소할만한 이유는 너무 많다. 특히 나처럼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경우엔 모든 스케줄은 고객사의 시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프로젝트나 요청은 늘 개인의 여행보다 우선시되니깐. 그게 에이전시니깐.
이제 와서 얘기하자면, 이번 여행도 취소해야 되는 상황이 오면 나는 그만두려는 각오도 했다.
'아니, 조직이 사람 하나 없다고 망하나?'
'이럴 거면 휴가는 왜 줘?'
그렇지만 사실 짬이 좀 찬 15년 차 직장인이라서 가능했다. 맡은 고객사가 3년, 5년 차 고객사다 보니 대충 한가한 시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여차하면 열은 좀 받겠지만 거기서 일하면 그만이었다. 말만 때려치운다는 각오지 사실은 다 계획이 있었달까. 9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바쁜 시기가 지나고 조금은 한가해질 수 있는 시간. 다 생각대로, 계획대로 돌아간다면 갈 수 있고 가서 즐길 수 있다.
그리고 9월 25일. 나는 비행기에 탔다.
총 30일의 일정 중 워킹데이는 18일. 그중 일하는 7일, 휴가는 11일. 휴일까지 합치면 일을 하지 않은 시간은 23일이다. 시간도 비용도 투자의 가치는 충분했다.
점심시간마다 수영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일상.
너무 좋지 않나?
저지르지 않으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저지른 다음에는 플랜 B도 (그만둘)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나 하나 좀 쉰다고 큰일이 나지 않는다.
물론, 다녀와서 일이 좀 많을 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