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을 같이 한다는 것

싸우고 화해하고 더 친해지기

by 헤이두

사람마다 삶이 방식이 다르듯, 여행의 방식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흔히들 친구하고 여행을 갔다 오면 진짜 친구가 되거나, 아니면 남남이 된다고들 한다. 물론 대판 싸우고 눈물의 화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같이 하는 여행과 혼자 하는 여행은 각각 장점이 있고, 나는 둘다 좋아한다. 다만 같이할 때와 혼자할 때, 여행지와 여행 방식은 달라진다. 휴양지로 일주일 미만 짧은 여행에는 친구들하고 가는게 최고다. 어차피 짧은 기간이라 대부분의 일정은 정해져 있고, 물놀이는 같이 해야 재밌고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유흥도 즐겨야 하니깐.


그럼 혼자하는 여행은? 여행 기간이 길어질 수록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편안해진다.


내 첫 혼자 떠난 여행은 스물여덟, 일년간의 호주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떠난 '동남아시아 배낭여행'이었다. 이때 난 혼자 가고 싶어서 혼자 갔다기 보단 갈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친구들 모두 한창 직장에 다닐 때이고 다들 입사 2-3년차 주니어들이었을 때니깐 20일 넘는 여행을 같이하자고 말조차 꺼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서 취업을 하게 되면 언제 다시올지 모르는 이 기회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결국 혼자 떠난 이 여행에서 나는 혼자 여행하는 즐거움과 외로움을 모두 여실히 느꼈다. 그리고 가끔은 혼자 여행이 조금 더 좋아지게 되었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여행의 시간을 내 마음대로 채울 수 있다는 것.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내가 자고 싶을 때 잔다. 내가 가고 싶은 데를 가고 싶을 때 가고,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걸 먹는다. 누군가와 조율할 필요도 없고 설득할 필요도 없고 배려를 받을 필요도 배려를 할 필요도 없다. 무언가 잘못 알아보거나 길을 잘못 찾아도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내 잘못이니깐.


친구들과 함께한 여러번의 여행에서 크게 싸운적이 딱 한번 있었는데, 사실 그거 때문에 한동안 데면데면했다. 이유는 웃음이 날만큼 사소했다. 우리는 배가 고팠는데 그 친구는 당장 먹고 싶었고 나는 계획한 곳에서 계획대로 먹고 싶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판 싸우고 서로 맘대로 하라고 있는대로 짜증을 내고 하루 가까이 말없이 지내면서 다신 같이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물론 우린 여전히 같이 여행을 다닌다). 지금 생각해보면 입장차이였지만, 다시 생각해도 여행까지 와서 겪는 감정 소모는 너무 싫다.


이 여행에서 나는 먹는 타이밍같은 사소한 것들이 잘 맞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쯤 참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같이 하는 여행은 기간이 길어질 수록 양보와 배려가 늘어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면 결국 싸움엔딩이지. 한달 간 발리 여행. 일부는 일을 해야하는 살기가 섞여 있는 여행. 이번 여행은 사실 여러 조건에서 혼자 하는 여행이 맞는 여행이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같이 하는 여행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한달간의 재택이, 그 친구에는 개고생 끝에 주어진 한달간의 유급휴가가 있었다. 속된 말로 아다리가 맞았다.


내향형 인간인 나는 유난히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말을 섞기가 쉽지 않은데 여행이 예외일 순 없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모르는 사람한테 웬만하면 말을 걸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애써 기회를 만들지 않는 이상 말할 기회는 없다. 인생 첫 혼자 여행에서 일주일간 가게나 식당을 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냈는데.. 문제는 내가 그냥 내향형이 아니라는 거다. 나는 말많은 내향형이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면 가슴이 답답한 지경이 이르게 된다.


앞에 주절주절 혼자 하는 여행이 좋은 이유를 잔뜩 써놨는데, 사실 갈등만 없으면 혼자보단 같이가 좋긴하다. 좋을 때 신나게 같이 떠들 수 있고, 나쁠 때 같이 괴로워할 수 있으니깐. 게다가 나 이쯤되면 좀 성숙해지지 않았나?


같이 가기로 했는데도 역시 걱정은 됐다. 혼자하는 여행에도 혼자하는 생활에도 익숙한 나한테 같이 일주일도 아니고 한달이란 시간은 짧지 않았다. 갔다 와서 남남 되는거 아니야? 란 걱정도 됐는데... 사실 좀 이기적이게도 얼마만에 찾아온지 모를 장기 여행을 망치진 않을까가 제일 걱정이 됐다.


성격 자체가 좋은게 좋은게 아닌 유난스러움도 있고, 여행 스타일도 좀 유난스럽다. 여행 가면 보통 하루에 적어도 2만보쯤은 걷고 이걸 할만큼 체력도 좋다. 먹는건 끝까지 참았다가 한번 제대로 먹는 걸 좋아한다. 아침 시간은 보통 여유 있게 보내는 걸 좋아하고 가이드 투어는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갈등이 꼭 생길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은 현실이 됐다. 문제는 필요이상으로 좋은 내 체력. 참고 걷다가 결국 엉뚱한데서 폭발해 버리는 그 친구와 갑작스러운 짜증에 짜증으로 대응하는 나. 밤 8시가 넘은 시간에 굳이굳이 걸어서 바다에 가겠다는 나와 위험해서 혼자는 못보낸다는 그 친구.


몇번의 갈등 끝에 결국 나는 걷는게 내 여행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이걸 못하고 여행이 끝나버리면 내가 얼마나 아쉬울지를 설명한 뒤에야 이런 순간이 오면 나는 걷고 너는 숙소로 돌아가자고 결론을 지었다.


당연히 갈등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 친구는 어떻게 생각할지 물어보진 않았지만 우리는 다 알지 않는가?

맛있는 것도 재밌는 것도 같이할 때 '더' 재밌다는 거. 조금만 참으면 더 즐겁다는 거. 아! 그리고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내 사진을 예쁘게 찍어줄 사람이, 그리고 정성스럽게 찍어줄 사람이 있으면 참 좋다는 거.

같이 하는 긴 여행은 여행 그자체로만이 아니라 또 다른 장점이 있다. 정말 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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