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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그라운드 Aug 29. 2019

카레 덕분에

노길우

아무거나 좋아.


‘뭐 먹을래?’ 하고 물으면 ‘아무거나 좋아’ 하고 대답하는 정도의 느낌. ‘아무거나’에 들어가도, 안 들어가도 별 상관이 없는 음식이 카레였습니다.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먹었던 카레를 언제부터 매일 떠올리게 됐는지 물으면, 저는 2016년 8월 19일을 기억합니다.


회사가 성수동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회사 근처 서촌에는 작은 식당 하나가 있었습니다. 매일 다른 일본 가정식 메뉴와 카레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식 메뉴를 주로 먹었어요. 조용한 가게 분위기가 좋아 일주일에 한두 번씩 찾아갔고, 자연스레 카레도 만났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날이 8월 19일이었습니다. 잠시라도 조용히 있고 싶어 회사 근처 그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토마토치킨 커리를 주문했습니다. 접시를 반 정도 비웠을 때였어요. 예산에 맞지 않는 무리한 제작사양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 오늘도 할 야근, 쌓인 집안일, 만성 거북목 통증도 잊고 카레에 집중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후끈한 공기와 흘리는 땀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무언가에 푹 빠진 기분이 새로웠습니다.


카레에 푹 빠진 8월 19일 뒤로 카레를 자주 먹었습니다. 카레는 먹을수록 새로웠어요. 노란 한국식 카레, 토핑이 올라간 일본식 카레, 인도 식당에서 먹던 커리와는 또 다른 모습의 카레를 접했습니다. 콩비지 찌개처럼 담백했던 채소 카레. 물기가 거의 없는 드라이 키마 카레, 매콤한 해물 커리 등, 카레의 모습은 다양했습니다. 같은 사람이 만들어도 향신료의 원산지나 배합, 넣는 타이밍, 채소나 고기의 종류, 수분을 내는 방식, 양파를 써는 방법, 온도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카레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기존 레시피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스타일로 향신료 조합을 다양하게 변주한 카레를 식당 사장님은 ‘스파이스 카레'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에는 스파이스 카레 식당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카레가 좋아졌습니다. 질릴 틈이 없었습니다. 카레를 기억하는 카레채집카드를 만들었습니다. 카레를 만날 때마다 날짜, 식당, 카레 이름, 카레의 맛, 날씨, 온도, 기분을 기록했습니다. 2017년부터는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기록합니다. 2017년에는 323번, 2018년에는 333번 카레를 먹었습니다. 


(카레채집카드)
(카레 기록 구글 스프레드시트)

카레를 만난 일상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향신료를 사서 스파이스 카레 만들기에 도전했습니다.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언젠간 카레 식당을 열고 싶어 종종 주말에는 12인분이 넘는 스파이스 카레 만들기 연습을 합니다. 버터치킨 커리, 일본식 드라이키마 카레 만들기는 익숙해졌지만, 끝도 정답도 없는 스파이스 카레의 세계 속에서 매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레를 만듭니다.


(첫 스파이스 카레에 도전했을 때 향신료 조합. 첫 스파이스 카레는 망했습니다)


(두 번째로 시도한 일본식 드라이키마 카레)


땀 흘리며 카레를 먹은 8월 19일로부터 일 년 뒤. 회사를 나왔습니다. 무언가를 이렇게 좋아해 본 적도, 일 년 동안 좋아해도 질리기는커녕 더 좋아지는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일 년은 카레에 푹 빠져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퇴사 다음 날 새벽, 도쿄 카레 여행을 떠났습니다. 3일 동안 카레를 다섯 번 먹었습니다. 몇 주 뒤, 매년 10월 열리는 도쿄 시모키타자와 카레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두 번째 도쿄 카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11일 동안 스물여덟 가지 카레를 만났습니다. 


(도쿄 카레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카레들)


도쿄 카레 여행을 다녀온 지 넉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카레가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도쿄에서 다양한 카레를 만났을 때의 기분이 몸에 남았습니다. 카레를 좋아하는 마음을 기억할 수 있는 만큼 남기고 싶었습니다. 글을 썼습니다. 도쿄에서 만난 열두 가지 카레를 소개하는 도쿄 카레 여행 에세이를 독립출판물로 만들었습니다.


(도쿄 카레 여행 에세이 《작고 확실한 행복, 카레》) 

책을 만들고 나니 말을 많이 해야만 했습니다. 독립책방에 책을 입고하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 시간 동안 카레 이야기만 하는 북토크를 했습니다. 서울 아트북 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가해 하루 여덟 시간씩 이틀을 서서 카레 책을 소개했습니다. 어떤 카레를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카레 식당은 어디인지 등. 카레를 좋아하는 마음과 카레를 둘러싼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입을 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저에게는 신기한 일이었어요. 평소와는 다르게 말하기가 부담스러웠던 마음이 조금 사라졌습니다.


카레를 좋아할 뿐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니 싫어하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걸 좋다, 싫어하는 걸 싫다고 말하는 용기도 생깁니다. 다른 시선의 영향을 전보다 덜 받습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주변을 존중하며 내 눈길에 조금 더 집중합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해진 뒤로는 선택하기가 쉬워졌습니다. 후회가 두려워 선택을 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후회할 때마다 삶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을 조금씩 터득하는 기분입니다. 가고 싶었던 도쿄의 카레 식당을 두 번이나 찾아갔지만, 제가 선택한 시간대에는 예상보다 줄이 길었거나, 재료가 빨리 떨어졌던 적이 있습니다. 계획에 없었던 상황 때문에 카레를 먹지 못했습니다.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던 저의 선택을 후회했고, 후회를 하며 충분히 아쉬워하는 방법도 배웠습니다. 삶을 느끼는 다양한 방법을 배웁니다. 조금은 쉬워진 선택하기 덕분에 퇴사 후 1년이 지나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결정도 할 수 있었습니다.


카레 덕분입니다.


‘오늘 뭐 먹을래?’ 하고 물으면 ‘카레’라고 답하는 수가 늘었습니다. 좋아하는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을 확실하게 채웠을 때 느끼는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아무거나’라고 말할 때와는 다른 기분으로, 내일 만날 카레를 기대하며 삽니다.


Writer 노길우 - 슬로워크 오렌지랩의 디자이너. 인스타그램 @currycurryblue로 카레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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