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alk 노길우 디자이너 인터뷰
FRAME은 체인지메이커들의 코워킹 커뮤니티 헤이그라운드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브랜드입니다. '일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을 담습니다.
Editor 김와이 황단단 | Photo 강희주
그는 인터뷰 내내 그만의 호흡과 속도로 조곤조곤 말했다.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뭔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원래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힘들어해서, 친한 사람만 만났었다는 말은 조금은 과장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라면, 아마도 그의 사이드 프로젝트 경험이 그에게 준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하고 계신 일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려요.
슬로워크 내의 오렌지랩이라는 팀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2018년에 독립 출판한 <작고 확실한 행복, 카레> 책의 개정판 작업을 한 출판사와 함께 하고 있어요.
슬로워크 오렌지랩에서 길우님은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클라이언트와 하는 작업이 아닌, 슬로워크 자체 프로젝트의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해요. 얼마 전에 헤이그라운드에서 진행했던 ‘새 역사의 가능성’ 강연이나 블로그를 포함한 외부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작업이 있고요. 내부 구성원 대상으로는 새로 오시는 분들의 웰컴 포스터나 내부 행사에 필요한 디자인을 할 때도 있어요.
슬로워크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되셨나요?
학부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쭉 디자인 관련 업무를 했어요. 슬로워크에 입사하기 전에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잠깐 일하다가 잘 안 맞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어요. 밖에서 보는 것과 좀 다르기도 했고요. 프리랜서로도 조금 일하다가 슬로워크가 지금보다 작은 규모였을 때 입사하게 됐어요. 회사의 생각이나 디자인 방식이 좋았어요.
슬로워크에만 3번 입사를 하셨죠? (웃음)
2년 차에 멋모르고 한 번 퇴사를 했었어요. 그리고 소셜 섹터를 벗어나 보고 싶어서 규모가 큰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일했어요. 그러고 났더니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 자체에 대한 고민이 좀 생겼어요. 그때 슬로워크에서 다시 한번 입사 제안을 받았어요. 두 번째 입사해서는 4년 정도 다녔어요. 그리고 1년 정도 제가 좋아하는 대상에 온전히 시간을 쏟아보겠다고 결심을 하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카레로 독립출판물을 만들었죠. 그 후에 슬로워크에서 다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프리랜서 일을 줄이고, 카레 관련 개인 프로젝트의 비중을 늘리고 있던 시기라 회사라는 조직에 다시 들어가도 좋을까 고민했어요. 아무래도 회사에 다니면 개인 프로젝트를 병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주 4일은 회사 일을 하고 나머지 1일은 개인 프로젝트를 해도 되는지 회사에 제안을 했어요. 고맙게 제 제안을 받아주셨고, 세 번째 입사를 했어요. 주로 하게 될 업무가 클라이언트 일정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회사 내부 일인 상황이라 가능했어요. (웃음) 지금도 주 4일을 일하고 있는데, 팀에 민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을 할 때가 많아요. 제가 개인작업과 회사 팀작업 사이의 모드 전환이 느린 편이라 작업 효율이 떨어지는 부분도 고민이에요.
3번이나 입사를 결심한 슬로워크의 매력은 뭔가요?
제 경우는 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좋은 동료들과 일하는 것이 좋았고, 지금도 좋아요.
영리 영역과 비영리 영역에서의 디자인이 차이가 있던가요?
차이가 아주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프로젝트에 따라 환경과 같은 사회적 가치가 디자인을 하는 과정에서 최우선으로 고려할 사항이 아닐 때의 빈도가 높았어요. 소재나 디자인 측면에서 모두요. 영리 영역에서는 아무래도 미관이 가장 높은 우선순위일 때가 많아요. 그렇다고 심미적 요소가 최우선 되는 방향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잘 만들어서 오래 사용하는 방법도 환경에 가치를 둔 방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작고 확실한 행복, 카레>는 어쩌다 쓰게 되셨나요?
1년 정도 하고 싶었던 걸 해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퇴사를 결심했어요. 처음엔, 그냥 카레가 좋다는 생각만 있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죠. 카레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서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올리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3-4개월 흐르니 위기감이 들더라고요. 다시 회사나 조직에 속해 일하기 시작하면, 카레에 맘껏 매달릴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내가 이만큼이나 좋아했던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이왕이면 책이면 좋겠다 싶어서 인스타그램에 독립 출판 계획을 올리고 시작됐어요.
카레라는 주제가 특이해요.
처음에는, 당연히 카레로 개인 프로젝트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좋았죠. 예전에 제가 핀란드에서 에어기타 세계 대회(기타 없이 음악에 맞춰 기타를 치는 퍼포먼스를 겨루는 대회)를 본 적이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참여자 모두가 진지해요. 작은 지역 행사로 시작해서 이제는 매년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세계적인 행사가 됐어요.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세계 평화'와 '다양성 존중'이라는 주제를,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몸동작 표현으로 공유하니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였어요. 카레를 좋아하는 일도 진지하게 해 보면, 에어기타처럼 뭔가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어렴풋하게 생각했어요.
독립출판물에는 원래 관심이 있었나요?
독립서점에 가끔씩 가서 구경하는 것은 좋아했어요. 원래는 책을 만들어서 독립서점에 입고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어요. 그러다가 텀블벅 펀딩이 떠올랐어요. 슬로워크에서 달력이나 굿즈를 만들어 펀딩을 한 경험이 몇 번 있었거든요. 카레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을 것 같아 처음엔 50명을 목표로 하고, 오프셋 인쇄가 아닌 디지털 인쇄로 진행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저보다 훨씬 과감한 지인이 그러지 말고 이왕 할 것 제대로 찍어보라고 해서 100명으로 목표를 바꾸고 책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제작사양을 바꿔 오프셋 인쇄를 했어요. 다행히 300명이나 응원을 해 주셔서 성공적으로 책을 만들었죠.
카레 이전에도 뭔가에 꽂혀 본 적이 있나요?
딱히 꽂히는 게 있진 않았는데 취미로 뭔가 하나는 해야지 하는 생각은 있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를 해봤어요. 목공도 해 봤는데 재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 금방 그만두었어요. (웃음)
원래 뭔가에 잘 질리지는 않는 스타일이에요. 시작하면 그냥 무던하게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카레가 좋았던 게, 확 빨려 들었다기보다 무덤덤하게 좋아진 느낌이에요. 그래서 계속 길게 좋아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원래는 퇴사했을 때, 요리를 배워서 식당을 바로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맛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어도 그걸로는 오래갈 수는 없겠다 싶었어요. 천천히 길게 기본부터 배워서 해 보려고 해요. 15-20년 후에는 저 혼자 커버할 수 있는 8-10인석 규모의 카레 식당을 하고 싶어요.
출판 프로젝트를 마치고 다시 일을 시작하신 거잖아요. 달라진 것이 있나요?
독립 출판하면서 겪은 경험들로 조금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우선, 예전보다 실수에 대한 긴장감이 조금 줄었어요. 원래 저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편이에요. 큰 실수를 하는 경우를 늘 상상하면서 긴장을 많이 했었거든요. 지금도 긴장을 하긴 하는데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출판 관련 업무를 하면서, 카레를 만들어 보면서 실패를 정말 많이 하거든요.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오히려, 아 이런 과정들이 결국 내 삶의 일부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게다가 카레를 만드는 경우엔, 제가 잘 만들기에 실패했을 때 사용한 향신료의 향은 절대 잊히지 않아요. 가끔 친한 카레식당 사장님이 새로 개발하신 카레를 먹어보라고 주세요. 맛을 보고 들어간 향신료를 맞춰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패로 각인된 향은 다 맞춰요. (웃음)
개인 프로젝트니까 좀 더 실패를 해 볼 마음의 여유도 있으셨던 거군요.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일만 계속했으면, 그 긴장감이 너무 높은 상태여서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못했을 것 같아요.
또 다른 변화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은 편해졌어요. 제가 원래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 얘기하는 걸 힘들어해서 친한 사람들만 만났었는데요. 책 만들고 입고하다 보니 서점 사장님들도 만나야 하고, 북토크를 제안받아서 진행하기도 했어요. 서울 아트북 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나가서는 하루 종일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이 인터뷰도 아마 예전의 저였으면 며칠을 고민했을 것 같아요. 요즘은 일단 한다고 하고 보는 것 같아요. 당황하더라도 그때 가서 당황하자는 생각으로.
주 4일 근무는 계속 유지하실 거죠?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출판사와의 작업이 끝나면, 그다음 개인 프로젝트는 무엇이 될까요?
독립출판을 한 번 더 해 보고 싶어요. 기성 출판은 아무래도 판형을 자유롭게 하기는 어렵거든요. 제가 갔던 카레 식당 중 50곳 정도를 뽑아서 핸디북 형태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가급적이면 내년 여름 전까지 마무리해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꼭 다시 가려고 해요. 지난번 경험이 저를 사람들에게 오픈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줬던 것 같아요.
일과 개인작업을 함께 진행하려면 정신없을 것 같은데, 균형은 어떻게 잡으세요?
사실 제가 거기 더해서 요즘 결혼 준비도 하고 있어서요. 사실 균형을 잘 잡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때그때 닥친 일을 처리해요. (웃음) 개인 프로젝트는 아무래도 속도가 조금 안 나고 있어요. 애인은 떡볶이를 엄청 좋아해요. 제가 만나서 카레만 먹자고 할 수 없으니 자연히 카레를 먹는 횟수도 조금 줄고 있죠.
축하드려요. (웃음) 일하는 길우님께 영향을 준 책이 있나요?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라는 책이요. 잘 몰랐던 부분을 알도록 도와준 책이에요. 저희 회사에서 빠띠라는 플랫폼을 운영하고 내부 커뮤니케이션 도구로도 활용하는데, 구성원 각자가 좋은 책을 추천하는 게시판이 있어요. 게시판에 동료분께서 추천하신 책이에요. 겪어보지 못한 입장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어요.
이번에 써 주신 에세이를 보는데 글이 참 잘 읽혔어요. 글 쓰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슬로워크 입사 초반에 블로그 글을 조금 쓰긴 했어요. 그런데 글이 잘 읽히셨다면 제 생각엔, 제가 문장을 길게 못 쓰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기억력 검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작업 기억력이 일반 사람들보다 낮은 편으로 결과가 나왔어요. 문장이 길면 앞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나요. (웃음) 그래서 최대한 간결하게 쓰려고 해요. 그리고 구글 번역기에 자주 돌려봐요. 매끄럽게 영어로 해석이 될 정도의 문장인지 보려고요.
카레를 주제로 책을 쓰는 것이 물론 저를 위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자어도 일부러 안 썼고요. 초등학교 3-4학년 정도가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어려운 어휘나 문장 표현은 제가 알지도 못하고요.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레 식당은 어딘가요?
서촌의 공기식당이라는 곳이에요. 카레 정보나 레시피 책에는 없는 카레 만들기 팁을 사장님한테 많이 배우기도 했고, 예전에 도쿄 여행 갈 때 며칠은 같이 다니기도 했어요. 메뉴가 매일 바뀌는데 다양하고 맛있는 카레를 맛볼 수 있어서 좋아해요. 식당의 차분한 분위기도 좋고요.
인스타그램 계정이 커리커리블루인데요. 왜 블루인가요?
우선, 흔하지 않아서 나중에 사이트명으로도 쓸 수 있는 이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저는 결국, 카레를 알리고 사람들이 카레를 더 쉽고 재미있게 느끼게 하고 싶은 거잖아요. 그래서 보통 주황색이나 노란색인 카레의 보색인 블루를 넣었어요. 제가 카레커리블루로 하는 활동이 노란색, 주황색 빛을 띠는 카레를 돋보이게 하는 파란 접시 같은 역할을 하기를 바랐어요.
일할 때 꼭 지키는 원칙이 있나요?
신념이나 원칙이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다만, 요즘 듣기 좋아하는 말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라는 동료들의 피드백이에요. 원래는 제가 고집이 세서 반대 의견을 듣고 받아들이고 조율해 나가는 걸 힘들어했었어요. 신입 디자이너였을 때는 클라이언트와 반대 의견에 부딪힐 때마다 힘들어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조율하는 과정을 즐겁게 하는 편이에요. 좋은 결과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만큼은 같으니까요. 특히 신뢰하는 팀원들과의 조율은 더욱 그렇고요.
길우님처럼 사이드로 개인 프로젝트를 하는 분들께 한 마디 해주신다면요?
각자의 상황이 다 다를 텐데요. 저는 결국엔 대상에 대한 애정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제 경우엔 시작은 틈틈이 카레집을 찾아가서 이면지에 끄적거린 카레 채집 카드였어요. 카레를 찾아가서 먹고 난 경험을 낙서처럼 적어뒀던 거죠. 제가 좋아하는 것이다 보니 시간이 흘러도 계속 자꾸 다시 하게 되더라고요. 작은 것이더라도, 자연스럽게 자꾸만 다시 찾고 시도하게 되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해요. 처음부터 거창한 목적을 갖고 시작하기 보다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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