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꿈, 드라마 작가

by 감 있는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다.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을 실어주는 작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젊음의 도전에는 작가로서 행복한 결말이 보이는 것 같았다. 대학교 3학년, 과감하게 휴학했다. 드라마 작가 교육원을 알아보니 등록하려면 면접 심사가 있었다. 기초반, 연수반, 전문반, 창작반 4단계로 기초반부터 통과해야 다음으로 진급할 수 있다. 문턱이 높아 보였다.


심사위원 중에 노희경 작가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노희경 작가의 명성만 알았지 작품을 제대로 본 적 없었다. 드라마 작가계의 전설 같은 분을 실물로 영접하는 거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가림막 사이로 앉아있었다. 수강생들은 한 명씩 들어가 일대일로 면접을 보았다. 운 좋게 노희경 작가와 마주했다. 커트 머리에 작은 얼굴, 중성적인 목소리, 사람을 향한 깊은 눈매가 느껴졌다.


“작품 몇 개 정도 생각했어요?” 마음만 앞서고 준비하지 않은 내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휴학이 걸려 있어서 거짓말했다. “세 개요.” 세 개라니. 하나도 흐릿한 장면만 떠오를 뿐인데. “말해 볼래요?” 나는 뿌연 안개를 헤매듯 더듬더듬 말했다. “몸이 불편한 여자와 남자의 사랑 이야기에요. 끝까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라고 했나? 오래된 기억이라 세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머릿속에 사진처럼 찍힌 장면은 노을 진 갈대밭에 서 있는 여자가 손가락 사이로 슬며시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노희경 작가는 희미한 웃음으로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면접이 끝났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간절한 눈빛을 읽어준 걸까. 그분은 역시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대가였다. 나도 잔잔하지만 인간을 향한 깊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드디어 드라마 작가라는 출발선에서 총소리가 울렸고, 난 열성적인 야생마처럼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웬걸, 기초반 수업은 따분했고 재미없었다. 나이 많으신 선생님은 이광수의 『유정』이라는 책을 읽어오라고 했다. <라쇼몽>,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를 부분적으로 틀어주시면서 이런 게 진짜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하셨다. 그윽한 사람 이야기를 쓰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선생님의 수업이 지루하기만 했다.


드라마틱 한 감동을 못 느꼈던 시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스터디를 가졌다.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로 구성된 소수의 모임에서 대본을 써보고 합평했다. 난 소용돌이처럼 내 안에 떠다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토악질처럼 내뱉은 첫 대본은 <침입자>. 스릴러물이었다. 평소 겁이 많아 공포물은커녕 미스테리물도 못 보는 쫄보인 내가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썼다. 우리는 모두 침입자처럼 서로를 침입하면서 산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으로 글이 날 끌고 가는 느낌을 받았다. 며칠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머릿속에 인물들이 떠다녔다. 거의 미쳐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전에 <침입자>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혼자 보기 무서워서 보지는 않았다. 두 번째 대본은 <엉겅퀴>. 몸과 마음의 상처 중에 어떤 게 더 큰지 말하고 싶었다. 내가 펼치고 싶은 의도와 달리 구상하기가 어려웠다. 노희경 작가에게 말한 내용처럼 갈대밭에 바람 부는 잔잔한 풍경이 아니었다. 햇볕에 서서히 마르는 빨래처럼 자연스러운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어둡고 불안한 정서는 태풍이 날리는 후미진 뒷골목으로 끌고 갔다.


힘들게 대본을 써갔던 어느 날, 스터디 하는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다. “너는 드라마 작가가 되기 힘들 거 같아. 악인을 정말 악인으로 그리지 못해.” 매번 과제를 안 해와서 벌금 내던 언니가 한 말이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실실거리며 웃는 언니가 정색하며 말한 것도 충격인데 내가 쓴 이야기가 나만 무서웠다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기초반에서 연수반으로 올라가는 것은 선생님 재량이었다. 당연히 연수반에 들어가고 싶었다. 시키지도 않은 스터디를 자발적으로 한 것도, 대본을 써본 것도 과감한 일이었다. 내심 노희경 작가에게 면접받아 합격한 수강생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게다가 휴학 기간도 남지 않았는가. 결과는? 불합격.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철떡 같이 믿었는데 연수반에 발을 딛지도 못하다니. 바람에 나부끼는 깃털처럼 쉽게 나동그라졌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애초에 드라마 작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상황이 바뀌면 순발력도 느리고, 다양한 사람의 성향과 감정을 대변할 만큼 폭넓은 구사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스터디한 언니의 조언처럼 악인을 악인으로 그려내지 못할 만큼 우유부단하다. 무엇보다 공상에 빠지면 그곳에 갇혀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스터디로 만났던 그녀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지낼까? 미술관에 놀러 가고, 영화도 보러 갔는데. 무엇이 그리 즐거웠는지 많이도 웃었댔는데. 시간이 꽤 흘러서 얼굴은 가물가물한데 그때의 분위기는 남아 있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던, 아무것도 없이 절실하고 심오하던 분위기.


우린 그때 드라마 작가가 아닌 날카롭게 비평하는 드라마 방청객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젠 드라마가 통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허무맹랑하게 느껴진다. 드라마 작가의 꿈은 날아갔지만 몇 년 전부터 몰래 꾸는 꿈이 있긴 하다. 언젠가는 연극 대본을 꼭 써보고 싶은 꿈. 이번에도 겪고 나면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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