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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Oct 25. 2020

잘 가, 마티즈!

내 마음의 트랜스포머


우리 가족에게 첫차였던 2001년식 중고차 카렌스. 12년형 된 흰색 카렌스를 3년 정도 탔을 무렵 지방국도를 달리던 중 본네트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차체가 덜컹거렸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엔진이 부르르, 푸르르 내뱉으며 시동이 꺼져갔다. 가족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었을까. 그 차 하나만을 만족하고 감사하던 가족에 대한 의리였을까. 우리를 길가에 안치하고는 스르륵 멈추었다. 기계도 수명이 다한다는 걸 느낄 만큼 차 안은 생기를 잃고 썰렁했다.


보험사에서 차를 폐차장으로 인계하기 위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견인차에 카렌스를 매달아 연결했다. 견인차에 들려 우리 가족은 앞면이 솟구친 채로 하늘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카렌스는 가족에게 첫 차라는 설렘도 안겨주었지만 마지막까지 아무나 겪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다.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폐차장으로 향했다. 차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치 가족을 지켜주던 충성스러운 늙은 개가 홀연히 떠나가듯 마음이 헛헛하고 울적했다.


남편은 새 차를 사고 싶다고 했다. 중고차의 잦은 고장 탓에 남편은 안전을 위해서라도 새 차를 사야 한다고 했다. 남편은 관심 있는 차의 팜플렛을 모았다. 주차장에서 전시된 차를 보듯이 차를 구경하고 비교해주었다. 나는 설렘도 잠시 언제 다 갚을지도 모르는 대출금에 돈이 뭉텅이로 더 얹어지는 게 싫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번 한 번만 중고차를 더 타면 안 되냐고, 중고차를 사서 내가 운전면허를 따고 연습도 하고 싶으니 양보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어렵사리 새 차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중고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며칠 뒤 우리 집 앞에 한 대의 차가 멈췄다. 남편의 친구가 경차를 몰고 왔다. 2004년형 마티즈Ⅱ. 색상도 오묘했다. 12년이 된 중고차는 50만 원, 수리비 50만 원, 총 100만 원. 세상에 그런 차가 어디있어? 하겠지만 그런 차가 여기 있었다. 최신형 핸드폰보다 더 저렴한 마티즈가 우리 집의 이동수단을 책임지게 되었다.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사실 감지덕지했다. 남편의 친구 동생이 당시 중고차 딜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푸르딩딩한 경차를 보자마자 색깔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그 차로 몇 차례 오고 가면서 점점 정이 들기 시작했다.


마티즈는 나에게 '처음'을 선물해주었다. 넘사벽 같았던 운전면허증을 가까스로 딸 수 있게 해 주었다. 초보운전 딱지를 달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운전대를 잡는다는 자체만으로 어른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부여했다. 시동을 켤 때마다 매번 긴장되고 자신 없었지만 운전석을 내어준 나의 첫 애마였다.


그 와중에 모서리에 부딪쳐 타이어 펑크 내거나 수동 전조등을 끄지 않아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힘이 딸려 오르막과 내리막길에 서 있을 때마다 온 신경과 힘이 브레이크를 밟은 오른쪽 발바닥에 모아 있기 했다. 친정엄마는 창피하니 이 차로 자신을 태우러 오지 말라며 철벽을 쳤다. 학교에 태우러 가면 맹랑한 아이는 “아줌마, 집에 다른 차 없어요? 이게 전부예요?”라는 말로 나를 측은하게 여기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모를 말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차가 나의 수준에 딱 맞는 거 같았다. 경차여서 그런지 아늑하고, 편안했다. 부딪히고 긁혀도 크게 부담이 가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나 아이들 등하교를 맡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동네 아이도 태우고 다녔다. 가능하다면 지인들을 태우고 다녔다. 평생 뚜벅이셨던 부모님 밑에 자라서 그런지 얻어 탄 차가 주는 안락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면 쌩하고 돌아서서 얼마나 멀어지는지도 알고 있었다. 차를 탈 때마다 차 안에서 풍기는 냄새가 참 좋았다. 좌회전, 우회전할 때마다 째깍째깍 나는 소리마저 껌 씹는 소리 같다며 따라 하곤 했다. 어린 시절 차가 없는 우리 가족은 가질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가 집에서 멀었다. 버스로 등하교를 했는데 몇 초, 몇 분 간격으로 버스를 놓칠 때가 많았다. 빨간색 신호등에 막혀 떠나가는 버스를 보며 얼마나 애가 타던지. 도저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어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혼자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갔다. 지금은 아이가 혼자 택시 타는 게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다. 엄마가 택시를 잡아주고 날 밀어 넣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쪼그라든 마음으로 탔다. 사실 그렇게 타기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택시는 아침부터 꼬마가 혼자 탄다고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초등학교가 위치한 곳이 사람의 인적이 드물다며 지나칠 때도 많았다. 택시비가 아까워 엄마가 같이 타 주고 날 내려주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할 순 없었다. 등교 시간이 임박해 오도 가도 못 하다가 운 좋게 택시를 타면 의자 끝에 앉아 조용히 울었다. 떠나간 버스를 놓치고 비싼 택시를 혼자 탄다는 것이 왜 그렇게 좌절감이 들었는지.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왜 그토록 부러웠는지.


기계치인 나는 지금도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언제나 긴장이 된다. 나도 타인도 믿을 수 없는 도로 위에서 재산과 생명을 담보로 건 편리함. 몇 번의 사고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 등하교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만이 내가 운전하는 이유와 정해진 테두리였다. 빠르고 편하게 아이를 차로 태워다 주고 싶었다. 초등학교가 그리 멀지 않았지만 늦지 않게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무거운 가방을 멘 아이의 어깨보다 어린 시절 차가 없었던 서러움과 막막함에 울고 있는 나를 달래주는 치유제였다.

   

2년마다 자동차 정기검사를 받았다. 마티즈를 3년 타던 해, 정비기사가 이번에는 손을 봐서 배기가스 적정치를 간신히 통과했지만 다음번 정기검사 때에는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마티즈는 세월에 속이 탔는지 더 이상 탈 수가 없다. 그동안 모든 임무를 수행했다는 듯 내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 폐차장으로 가는 날짜를 잡고 우리는 이별식을 거행하듯 아이들과 나는 차를 타고 차에서 있었던 추억을 헤아렸다.


남편이 운전해서 남해에 놀러 갔던 추억.

운전면허시험 주행연습을 도와주던 남편의 불안한 눈빛.

사고 내서 아이들 코피 내고 난 앓아누웠던 깊은 한숨.

외제차를 긁고 심하게 떨리던 눈동자.

뒷좌석에서 아이들 태우고 초긴장한 나의 어깨.

한여름 뜨거운 열기로 차에 타면 숨이 막히고, 엉덩이를 찜질하던 따끔함.

가방이 찰랑거릴 때마다 혼자 삑삑 소리를 내던 차 키의 존재감.

항상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던 웅장한 소리.

아주 가끔은 차가 부끄러워서 멀리 주차했던 미안함.

동네 아이들을 태우고 데려다주던 뿌듯함.


마티즈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준 거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기억을 더듬고 쓰다듬으며 구석구석 만져보았다. 코로나로 등하교를 안 해서 그런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꼬질꼬질했다. 얼룩마저도 헤어짐을 아는 마티즈의 눈물 자국 같았다. 차를 깨끗이 닦아주었다. 차는 떠났고, 또다시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몸뚱어리에 붙은 두 발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쉬웠고 허전했다. 차는 분해되어 고철덩어리가 되겠지만 편리함 이상으로 나에게 보상을 해주었다. 작고 낡은 마티즈가 어린 시절의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제는 운전할 수 있고, 아이를 태울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힘이 닿는 만큼 태울 수 있었다. 처음 나의 수족이 되어준 마티즈. 트랜스포머처럼 변화무쌍하게 변신하지 않아도 나의 짠한 구석을 여러 모양으로 위로해주었던 마티즈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다. 잘 가, 마티즈.





그림: by 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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