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채우는 음식

by 감 있는

설날에 먹는 음식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주관식 문제였다.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다’라는 순진하다 못해 기초 상식이 전혀 없어 무식한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음식을 묻는 질문으로 받아드렸다. 우리 집에서 가장 귀중한 음식은 뭘까? 가장 귀해서 아껴 먹는 음식. 일 년에 한 번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 난 한참을 고민하다가 설날에 먹는 음식이라는 질문에 ‘누룽지’라고 썼다.


우리 집은 누룽지가 귀했다. 압력밥솥 바닥에 들러붙은 밥풀을 자작하게 물 넣고 끓인 누룽지. 한 대접의 누룽지는 식사를 마친 아빠의 몫이었다. 아빠가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누룽지를 후루룩 드시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얹힌 속이 내려가는 거처럼 개운해 보였다. 단숨에 그릇을 비워내는 아빠를 보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음식은 저것일지도 모른다고 굳게 믿었다. 나도 먹고 싶었으나 뽀얗게 우러나오는 누룽지 한 대접은 내 차지가 될 수 없었다. 엄마가 아빠에게만 차려주는 융숭한 만찬이었다.


설날에 먹는 음식이 떡국이라는 걸 정확히 모르기도 했지만 설날 대표 음식 떡국과 추석 대표 음식 송편을 물리치고 내가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은 누룽지였다. 혹시나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아주 작은 글씨로 썼던 누룽지. 자신 없이 조그맣게 쓴 누룽지라는 글자에 틀렸다는 채점의 작대기가 그어졌을 때 내 마음에도 스크레치가 생겼다. 마침 우리 집에 놀러 온 옆집 아주머니는 그 시험지를 보고 숨도 못 쉬며 배꼽 빠지게 웃으셨다지.


가장 귀한 음식이라 여기던 누룽지가 틀리다니. 내 마음이 들킨 거 같았다. 정답인 떡국에 비해 초라해 보이던 누룽지가 내 차지도 될 수 없었다는 걸 들킨 거 같았다. 밥이 눌어붙은 누룽지마저 눈치를 봐야 했던 내 마음도 새카맣게 타버려 딱딱해졌다. 이 사실을 마음속 비밀처럼 간직했다가 이제야 밝힐 수 있는 걸 보니 엄청 슬펐던 모양이다. 뜬금없이 아이에게 “설날에 먹는 음식이 뭐게?”라고 묻기도 했지만.


오늘 아침에 뭘 먹고 싶냐는 나의 물음에 아이는 “누룽지”라고 대답한다. 입맛 없을 때 누룽지에 김치 한 조각 올려두고 먹는 그 맛을 너도 아는구나. 김 한 장 올려두고 먹는 그 맛은 얼마나 착 감기는지. 입안이 텁텁할 때도, 속이 쓰릴 때도 누룽지 한 모금은 지친 몸과 마음을 스르륵 풀어주었다. 때가 끼고 기름기 쌓인 속을 씻어내어 영혼까지 맑아지고 깊어지는 느낌이랄까.


지금도 누군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먹어본 음식과 먹어보고 싶은 음식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조용하게 또 자신 없이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건 누룽지라고. 속이 체하거나 아플 때 누룽지가 내 차지가 될 수 있었다고. 휘몰아치듯 회초리 같은 찬 서리를 맞을 때 온몸 구석구석 데펴 주던 음식이 누룽지라고. 누룽지 한 그릇이면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았던 어린 시절. 빈 그릇을 더듬어 따끈한 누룽지를 가득 담는다.

이전 02화마흔의 재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