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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Nov 03. 2021

훈련이 필요해


 환절기여서 그런가. 피부도 건조해지고, 물을 마셔도 갈증이 잡히지 않는다. 신선한 채소를 한입 가득 베어 먹을 수 있다면. 월남쌈이 너무나 먹고 싶은 걸 보니 재료를 준비할 때가 되었다. 남편은 월남쌈을 식당에서 돈 주고 사 먹는 건 아까운 짓이라며 절대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프리카, 방울토마토, 오이, 깻잎, 양배추, 크래미, 차돌박이 등등 재료를 모으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마트에서 꼭 하나씩 잊어버리고 사느라 그랬다. 드디어 때가 이르러 채소를 깨끗이 씻고 채 썰어서 접시에 가득 올리고는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상큼한 소스가 더해져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큰 아들 기쁨이가 도통 먹지 않는다. 채소를 싫어하는 걸 알고 있어서 어제 먹었던 콩나물 김칫국을 주었는데 숟가락이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이번 김칫국은 김치찌개보다 덜 맵고 맹숭하다나. 내가 라이스페이퍼에 채소를 가득 채워 먹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저런 걸 먹지?’라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다. 남편은 맛있다고 감탄하며 먹다가 깨작거리는 기쁨이에게 한마디 한다.



 “너 그렇게 편식하면 나중에 아내가 고생한다.
음식을 먹을 때 맛이 느껴지지?
혀에 어떤 맛이 느껴지면 그게 맛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먹는 것에도 훈련이 필요해.”



 엥? 혀에 어떤 맛이 느껴지면 그게 맛있는 거라고? 남편의 훈계가 아들에게 이어지는 동안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남편의 말이 사뭇 진지했기 때문이다. 나는 말없이 월남쌈을 먹기에 바쁘기도 했지만 혀에 맛이 느껴지면 맛있는 거라니. 어리둥절했. 월남쌈은 채소만 손질해서 먹는 거라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동안 내가 요리한 음식에서 맵고 짜고 시고 단 맛이라도 자극이 되면 그걸로 맛있다고 생각하며 먹었다는 건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긴 한데 도대체 무슨 말이지? 맛있다는 거야, 맛없다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 말. 훈련이 필요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라이스페이퍼에 채소를 올려두고 싸 먹으면서 그동안 남편의 행적을 곰곰이 떠올렸다. 내가 어떤 요리를 하더라도 남편은 항상 맛있다고 했다. 맨날 두 그릇씩 먹지 않았던가. 외식보다는 집밥이 최고라고, 회사 다닐 때 점심과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다보니 질려버렸다고, 칭찬 일색인 남편 덕분에 나는 요리를 잘한다고 믿어왔다. 분명 내가 해준 음식에는 정성이 느껴진다고 했는데. 남편은 결혼생활 이후 얼마만큼의 훈련이 되었던 것일까.

   

 신혼 초기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갈증이 났는지 물김치를 김치냉장고 통에 가득 만들었다. 배, 사과, 오이, 당근, 무 등등 맛깔스럽게 보이려고 적채를 넣어 보랏빛으로 물들였던 것도 같다. 남편은 그때도 환상적으로 맛있다고 했다. 처음으로 만든 물김치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마침 시댁에 식사 모임이 있어서 물김치를 싸 갔다. 나는 자신 있게 물김치를 꺼냈다. 어머니와 네 분의 형님들이 한 수저씩 드시더니 뭔가 침묵이 가라앉았다. 숟가락을 동시에 내려놓고는 더 드시지 않았다. 형님들의 말 없는 눈빛이 오고 갔다. 난 눈치가 없어서 침묵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남편은 그때도 맛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목사님이신 둘째 아주버님이 이상한 소리를 하셨다. “그래도 난 맛있는데?” 둘째 형님이 밥상 밑에 아주버님의 허벅지를 아주 빨리 툭 쳤을 때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눈을 의심했다. 왜지? 그.래.도. 맛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시댁에 다녀온 뒤로도 물김치를 먹었다. 너무 많이 담갔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엄마에게도 물김치를 드렸다. 엄마도 한 수저 드시더니 드시질 않는다. 배부르신가. 나는 자랑하듯 말했다.

 

“엄마, 아주버님이 이 물김치 맛있데.”

“이걸 드렸어? 진짜? 이걸 가져갔다고?”

“응, 그게 왜?”

“그 목사님… 진짜 목사님이다.”


 엥? 무슨 얘기지? 물김치와 목사님의 상관관계는 뭘까. 불교 신자인 엄마가 목사님을 인정해주다니. 맛있다고 말해준 게 진짜 목사님이라고 칭송받을 일인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엄마의 눈은 미간이 잡힌 채 탄식이 서려 있었다. 그때야 깨달았다. 물김치가 남편이 맛있다, 맛있다 하도 주문을 외워서 맛있게 느껴졌다는 사실을.


 나는 정말 내가 요리를 잘한다고 믿었다. 아니 믿어왔다. 남편이 맛있다는 말을 남발할수록 더 맛있게 느껴졌다. 김치볶음밥 하나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좋아하던 남편의 말은 분명 진짜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둘째 귀요미가 급식이 맛있다며 점심을 많이 먹으려고 아침을 대충 먹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마음만 먹으면 모든 요리를 너끈히 해낼 줄 알았는데 요즘 실력이 늘지 않는 건 내겐 요리에 정말 소질이 없는 걸까. 고기를 굽거나 라면을 끓이는 타이밍이 중요한 순간에는 남편이 꼭 자처한다. 어쨌든 삼식이 남편이 반찬 투정 없이 먹어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이었길래 남편은 내가 하는 모든 음식이 맛있다는 걸까. 아들도 훈련생도로서  잘 통과해야 할텐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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