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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당탕탕수타트업 Dec 11. 2015

아버지와 자화상

2014년 어느 가을의 기록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하는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가 나는 좋았다. 딱 한 구절 때문이었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바람이다

서정주 시인이 훗날 친일시를 썼고, 독재정권을 찬양하는 시를 썼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실망했음에도 나는 지금도 저 시만큼은 싫어할 수 없다. 혹자는 묻는다. 같은 제목을 가진 윤동주 시인의 시도 있지 않냐고. 물론. 그리고 나는 그 시도 좋아한다. 


그런데 같은 제목을 가진 윤동주 시인의 시에선 왠지 모를 의연함이 묻어나오는 반면, 서정주 시인의 시에선 한탄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가야만한다는 무언가의 의지 느껴진다.

할머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넓은 평야를 보면서 나는 어이없게도 저 시를 떠올렸다. 아마 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해야할테다.

애비는 시골 농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때 도시로 유학을 갔다. 본인의 의지였는지 할아버지의 뜻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그 시골에서 없는 살림에 큰 아들을 내보내진 않았을테니 아마 본인의 의지였을테다. 아버지는 "그래도 우리는 밥 먹고 살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아들 하나를 타지로 보내 대학 공부까지 시킨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나보다. 아버진 고모 할머니 댁에 얹혀살며 고등학교까지 다녀야했고, 대학 때엔 기숙사비가 없어서 절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엄마 말에 따르면 결혼 후에도 아버지의 학자금 대출을 갚았다하니 시골에서 대학이라는 고등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느껴진다.

졸업 후 아버지는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늘 단정했으며 사리 분별이 명확했다. 그리고 늘 나만큼이나 새로운 걸 시도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시골 어른들은 유교사상이 강했지만, 아버진 내게 말도 안되는 유교사상을 들이밀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가 평범하게 살았기에 나는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내가 좀 더 좋아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선언했다. "스타트업에 가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깨어있는 아버지도 딸이 말한 저 문장을 마음으로 온전히 이해하는 데까진 시간이 걸리는듯 했다. 대놓고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그냥 남들처럼 공채 준비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하면 차라리 맘 편하겠다는 표정이셨다. 그런 아빠 표정을 보며 나는 아빠가 물려준 자유가 아니냐며 항변하며 여기까지 왔다.

하루에 동네에 들어가는 버스가 몇 없는 곳. 집, 논. 집, 논.만이 반복되는 이 동네보며 나는 아버지의 삶에 대해 상상해본다. 올해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부모님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 my way를 고집하며 그냥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그러면서 다시 생각한다.
서정주의 자화상의 마지막 문장은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라는 것을. 일단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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