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관계 기상이 돌변하는 건 대단한 사건 탓만은 아니다. 사소한 말이나 몸짓에서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순간 참지 못하고 뱉은 말이나 무심코 나온 행동이 관계를 이어주기도 하고 멀어지게도 한다. 익숙함에 가려 있던 면모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날 따라 유독 좁아 보이는 어깨가 연민을 불러오는가 하면 한 순간 튀어나온 이기적인 말에 만정이 떨어지기도 한다.
마을 주민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나미야에게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전달된다. 고스케라는 중학생이 보낸 편지로 빚을 지고 채무자들을 피해 야반도주를 계획하고 있는 부모를 따라가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게 사춘기 소년에게는 적잖은 고민이었나 보다.
고스케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자기 방에 오디오를 갖추고 음악 감상을 하던 유복한 아이였다. 그런 고스케가 어쩌다 애장 하던 비틀스 음반까지 친구에게 팔아넘겨야만 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사업이 기울면서 변해가는 아버지 모습을 보는 것이다.
고민에 대한 답변을 고민하던 나미야는 ‘한 번 흩어진 가족은 다시 하나가 되기 쉽지 않다’라는 지극히 어른스러운 답변을 적어 보낸다. 조언을 받은 고스케는 낡은 트럭에 가재도구를 가득 싣고 떠나는 부모님과 함께 야반도주한다.
아버지는 손을 씻지 않고 화장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스케 안에 있던 어떤 끈이 뚝 소리를 내며 끊겼다.
아마도 그건 아버지 어머니와 맞닿아 있기를 바라는 마지막 마음의 끈일 터였다. 그것이 뚝 끊겼다. 그것을 고스케 스스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야심한 새벽 고속도로 휴게소. 혹시라도 눈에 띌 새라 아버지는 멀찌감치 트럭을 세운다. 화장실에서 일을 본 아버지는 손을 씻지도 않고 나가버린다.
그 모습을 본 고스케는 부모를 떠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는 주차되어 있던 대형 트럭 짐칸에 올라탄다. 그렇게 그의 삶은 새롭게 시작된다.
고스케가 독립을 결심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평소와 달리 용변을 본 뒤 손도 씻지도 않고 돌아서는 아버지 뒷모습을 본 뒤다. 어쩌면 거기서 항상심을 잃고 휘청대는 어른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아버지가 더 이상 운명을 나눠질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거다.
관계란 달이 지구 주위를 돌듯 의존성과 독립심응 끊임없이 오가는 과정이다. 그러다 중력을 완전히 벗어나 독립을 감행하기도 한다. 타성에 젖은 의존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지도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 이탈의 순간은 상대의 사소한 언행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그 사람 몸이 아닌 언행과 살아가는 것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관계는 말과 행동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렇다면 관계를 관리한다는 건 언행을 주의하는 것의 다른 말일 것이다.
엔지니어 출신답게 작가는 고아들이 모여 살아가는 ‘환광원’과 ‘잡화점’이란 공간을 축으로 그곳 출신자들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정교하게 엮어낸다. 그 덕에 독자는 시간제약을 벗어나 쇠락해 가는 도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입체적으로 보게 된다.
크리스마스 레드와 그린으로 꾸며진 책 표지와 커버는 삭막한 이시대를 따뜻하게 밝혀 준다. 동시에 시즌에 갇혀버린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그저 스쳐가는 이야기에 그칠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나마 스테디셀러 매대에 올랐고 조만간 영화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