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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혁 Sep 22. 2024

애증을 넘어 공감으로 이끈
피에 관한 이야기

허삼관 매혈기 중에서

“내가 공장에서 누에고치 나르면서 땀 흘려 번 돈을 일락이한테 쓰는 건 나도 바라는 바지만, 피 팔아 번 돈을 그 애한테 쓰는 건 왠지 좀 그렇다구.”
  

  이 이야기는 ‘피’에 관한 이야기다.
   1분에 한 바퀴씩 몸을 돌며 온기와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붉은 빛깔의 액체에 관한 이야기이자, 현명한 남자를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나누어 가진 인류의 면면에 흐르는 인간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잔잔히 흐르다가도 순식간에 끓어오르고 때로는 차갑게 식어버리는 피만큼 변화무쌍한 피에 관한 이야기.


   이야기는 내전서 승리한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즈음 어느 성에서 시작된다. 세상 어디든 바보 취급받는 사람 하나씩은 있듯 주인공은 사람들로부터 ‘자라대가리’ 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우리로 치면 소갈머리 없는 사람 정도다. 자기 집 세간 들려나가는데 삯꾼보다 더 힘을 쓰는 그런 사람 말이다.


  적당히 살아가던 주인공은 어느 날 성 밖에서 다가오는 사람들과 말을 섞게 된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따라가다 얼떨결에 팔까지 걷게 된다. 처음으로 피를 판 것이다. 거기다 축난 몸 보하려 먹는 데운 황주 두 냥과 돼지 간볶음 맛도 알게 된다.


  갑작스러운 횡재로 뭘 할까 고민하다 색시를 얻기로 한다. 그리고는 “아이야”하는 교성으로 동네 총각 마음을 헤집고 다니는 미인 허옥란을 부인으로 들인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기 피가 생활밑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매혈 담당자 이혈두와 그토록 모진 연을 맺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이기적인 유전자


  싫어. 난 앞으로 아무 일도 안 할 거야. 이제 집에 오면 좀 쉬어야겠어. 쉬는 게 어떤 건지 아나? 바로 이런 거라구. 등나무 평상에 누워서 두 다리를 의자에 걸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어? 바로 당신을 벌주기 위해서야. 당신이 저지른 잘못 말이야. 당신은 나를 배신하고 그 후레자식이랑 잠을 자서는 일락이 까지 낳고....... 그 생각을 하니 또 열받네. 그런데도 나더러 쌀을 사오라구? 꿈 깨시지.


   언제부턴가 장남이 부모 중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모일 때마다 사람들은 출생의 비밀에 대해 수근 거렸고, 급기야 허삼관이 아닌 부인의 첫사랑인 하소용 얼굴이 나온다는 말까지 나온다. 


  결국 일락이까지 그 소문을 듣고 와 고하는 바람에, 한사코 발뺌하던 부인을 윽박질러 자백을 받아낸다. 그리하여 누구보다 자신을 따르던 장남이 제 씨앗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늘이 노래지고, 남의 자식인 줄도 모르고 구 년씩이나 먹이고 입혀 남 좋은 일 한 자라대가리 소리 들을 게 무엇보다 억울하다. 부인을 끌고 가 뺨을 몇 대 올려붙여봤으나 분이 풀릴 리 없다. 그러자 아예 평상에 들어 누워 손 하나 까딱 않기로 선언한다.


  엎친 데 덮친다고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던 일락이가 사고까지 치고 만다. 대장간 방 씨 아들 머리를 돌로 내리찍은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아무 데나 돌 총 쏘고 다니는 셋째와 영악한 둘째의 합작품이었지만, 그래도 첫째라고 동생들을 보호하려 들었던 일락이가 모든 걸 뒤집어쓴다. 


  그 상황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한들 일락이가 무사했을까. 아마 밥도 제일 많이 축낸 것이 동생 하나 간수 못한다고 욕 들어먹었을 게 뻔하다. 울고 싶은 데 뺨 때린 격으로 그렇지 않아도 억울하고 분하던 허삼관은 당장 니 아비에게 가서 치료비 받아오라고 일락이를 하소용에게 보내버린다. 


   그렇다고 자라대가리 자리를 호락호락 넘겨받을 하소용이 아니다. 엄마가 시킨 대로 네 번이나 아버지라 불러보지만 혹시라도 자기에게 불똥이 튈 새라 하소용은 냉정하게 쫓아버린다.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게 된 일락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바지를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다. 하루아침에 아비도 없는 자식,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도 못하는 홍길동으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큰 기대 안 했던 허삼관은 둘째와 셋째를 불러 앉혀놓고 커서 하소용 딸을 강강해버리겠다는 말도 안 되는 다짐을 들은 뒤 이혈두를 찾아간다. 첫 번째 때와는 달리 비통한 심정으로 팔을 내민다.




  아이들은 가정이라는 베이스캠프에서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배워간다. 일락이 역시 아빠의 체온과, 부드러운 음성, 심장박동을 느끼며 정을 붙였을 것이다. 아버지 행동과 말투를 따라 해 지 아비 닮았다는 소리를 들으며 허삼관의 아들임을 확신해 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 흐뭇해하는 아빠 미소를 바라보며 자신의 가치를 확인했을 거다. 


  그렇게 세상의 전부였던 아버지에게 내 자식이 아니란 소리를 들을 때 아이 심정은 어땠을까. 텅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는 깊은 산속에서 나침반도 없이 길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다. 늘 바라보고 의지하던 대상이 별안간 사라졌을 때 공포는 다 큰 어른들의 머리로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내 핏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자식을 냉정하게 밀쳐낸 아버지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기 세간 들어내는 데 일꾼보다 더 힘쓰고, 전날까지 쓸고 닦았을 세간 싣고 떠나가는 수레 뒤에서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던 인간적인 사람이.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이유로 냉정하게 아이를 밀쳐낸 아비의 행동에서 연대감의 두 얼굴을 보게 된다. 공감이 다른 사람과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고 그들을 위해 자기 이익을 희생하게 만든다면, 연대감, 즉 집단 정체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그들을 위해 자기 이익을 희생하게 만든다.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가족은 당연히 강한 연대감을 가진다. 이는 같은 유전자를 나누어 가진 동족을 보호함으로써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확률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물에 빠진 사람 중 동생을 먼저 구하는 것도 유전자를 나누어 가지게 될 동족을 확보하려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힘 때문이다. 


  아무리 소갈머리 없다해도 자기 피 한 방울도 안 섞인 아이를 품음으로써 자기 유전자를 세상에 남길 아들이 손해 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연대감은 우리라는 운명 공동체를 만들지만 그들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몹시 다르게 대하기도 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문화 대혁명이 좋은 예다. 하나로 뭉친 홍위병들은 지주와 지식인을 인민의 적으로 돌려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다.  


  좋든 싫든 간에 안은 뜨겁고 겉은 차가운 연대감은 좋은 쪽으로나 나쁜 족으로 강하게 작용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동질성을 가진 사람을 최대한 확보하는 게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장구한 세월 동안 피에 새겨진 생존전략을 일개 개인이 거역하기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피까지 팔아가며 번 돈을 핏줄이 아닌 아이에게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일락이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애증에서 시작된 공감 연대감을 넘다

  정부정책 실패로 고난의 시기를 보내는 식구들에게 맛있는 밥 한 끼 먹여보겠다며 허삼관은 또 한 번 피를 뽑는다. 큰 돈을 쥐게 된 허삼관은 국수가 맛있는 승리반점으로 향한다. 잔칫날과 진배없던 그날도 일락이는 제외다. 조상의 피 묻은 돈으로 남의 자식 걷어 먹이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그의 피를 차갑게 만든 것이다. 


  그나마 맘에는 걸렸는지 고구마나 사 먹으라며 돈을 쥐어 쥔다. 화창한 어린이날 한 놈 떼어 놓고 놀이동산 가는 격이다. 맛있는 국수 생각에 들떠서 집을 나서는 가족의 뒷모습을 일락이는 쓸쓸하게 지켜본다. 


  생각보다 고구마가 작아 허기가 가시지 않자 일락이는 국수를 먹고 있을 가족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불 꺼진 승리반점만 확인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서러운 밤을 지새운 일락이는 날이 밝자마자 친부를 찾아가 국수 좀 사달라고 애원한다. 국수는커녕 욕만 실컷 먹고 쫓겨난 일락이는 그 길로 국수 사줄 사람을 찾아 집을 나간다. 


  동네 사람들 걱정에 눈 하나 꿈쩍 않던 허삼관도 부인까지 나서자 하는 수 없이 일락이를 찾아 나선다. 한참 찾은 뒤에야 울다 지쳐 벽에 기대앉은 일락이를 발견한다. 대뜸 욕부터 나오는 게 당연하다. 


“자. 업혀라.”...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 놓고......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 거 아냐. 널 십일 년이나 키웠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 안 되는 거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일원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다.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하란다.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보이자 일락이가 허삼관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문득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허기져 가벼워진 아이를 등에 업고 가면서 허삼관은 쉴 새 없이 욕을 해댄다. 그런데 신기하다. 그가 쏟아붓는 욕이 차가운 서릿발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 소복이 쌓이는 함박눈처럼 따듯하다. 읽기만 했음에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런 게 욕설의 긍정적 효과일까. 어쩌면 이물 없는 사이에서 시의적절한 욕은 관계의 혈을 뚫어주는 효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욕을 이처럼 부담스럽지 않고 맛깔나게 할 수 있다는 게 인간적인 것일까. 


  그날 밤 허삼관이 쏟아낸 욕은 기구한 팔자와 어린것에게 못할 짓 했다는 자괴감에서 나오는 배설물과도 같다. 이 과정에서 허삼관은 응어리진 화를 풀어낸다. 그리고 국수에 대한 갈망과 가족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겪게 된 아들의 서러움에 공감하게 된다.


  

  얼마 후 울타리에서 겉돌던 일락이를 진정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사경을 헤매는 원수 하소용을 살리려 일락이를 그의 집 굴뚝에 앉히기로 한 것이다. 하소용 부인의 간청으로 이뤄진 일이다. 그 덕에 일락이는 쓰라린 기억이 남아 있는 집으로 가야만 했고, 동네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가운데 지붕 굴뚝으로 기어 올라가야만 했다. 


  내키지 않았는지 뭉그적대는 아들을 허삼관은 사람의 양심 운운하며 쫓아 보낸다. 아버지 명이라 거부도 못하고 죽으러 가는 놈 마냥 엉거주춤 기어 올라가는 아이 뒷모습과 굴뚝에 올라타 서러운 마음에 목을 쥐어짜며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의 표정에 허삼관 마음은 다시 한번 움직인다. 그리고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공표한다. 


  누가 뭐래도 일락이는 오늘부터 허삼관의 아들이라고. 이에 딴지 거는 사람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깊은 공감이 차가운 연대감의 벽을 무너뜨린 것이다. 애증이 공감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애증은 사랑과 미움이 엉켜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이다. 감정의 성격도 모호해 처리하기도 쉽지 않다. 속이 뒤집힐 때 한바탕 쏟아 붙고 나면 속은 시원해진다. 하지지만 동시에 살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도 느낀다. 대개 가족처럼 가깝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서 나타나므로 고통은 더 크다. 저주와도 같은 이 감정에 구원이 존재할까.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 있다. 어차피 분리될 수 없는 관계라면 성장의 길로 나가는 게 최선이다. 조금이라도 성숙한 누군가가 상대방을 그 길로 이끄는 것이다. 감정의 홍수를 넘어 상대방의 내면과 이면, 배경까지 이해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다. 그 과정에서 입게 될 수많은 상처를 감수해야 한다.


  특별하게 창조한 인간이 약속을 저버렸을 때 신이 느낀 감정이 애증이고 해결한 방법이 성장의 길이다. 잊을만 하면 배반의 고통을 안겨주는 인간을 구원하려 신은 방주 한 척과 나무로 된 형틀을 준비했다.  


  인간의 피에는 이익 앞에서 차갑게 식어버리는 고약한 성질과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아파하는 공감 모두 존재한다. 어쩌면 이 치졸한 한 남자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자식까지 품을 수 있게 된 건, 일이 닥칠 때마다 조금씩 피를 뽑은 덕분에 동물적 본성은 희석되고 인간적인 본성이 좀 더 농축돼 가능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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