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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현관이 존재하는 이유

부모 역할 다시 보기

by 장동혁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누군가 다가와 최고급 호텔 평생 이용권을 주며 귀가하지 말라고 하다면? 순간 고민 할지언정 결국 집을 택할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족에게 돌아갈 때 반드시 거치는 곳이 있다. 현관이다. 그렇다면 가정으로 돌아가며 현관을 거치는 건 왜일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십여 년 전, 교회에 새 전도사가 부임해 왔다. 그는 거룩한 분위기를 풍기는 다른 전도사들과는 달리 수확을 앞둔 사과처럼 반짝거렸다. 무슨 일이든 확신에 차서 움직였고, 그러면서도 지켜야 할 선은 철저히 지켰다. 단호함과 유연함 그리고 자유함으로 빛나는 그의 매력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하던 차에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전도사와 함께 교사엠티 장소를 물색하던 중 당시 읽고 있던 책 이야기를 꺼냈다.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그 책을 보니, 하나님 얼굴에 침을 뱉지 않는 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던데요


내 딴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답이 돌아왔다.


아니, 침을 뱉어도 갈 것 같은데요?


거리낌 없는 그의 대답에는 확신과 함께 깊은 신앙적 통찰이 담겨 있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나에게 그가 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호기심 많던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빨간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비디오테이프가 데크에 끼어버렸고,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둔 채. 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교회 목사인 아버지가 비디오 데크를 사용하게 되었다. 데크가 작동하지 않자 아버지는 수리를 맡겼는데, 하필 교인이 운영하는 전파상이었다. 얼마 후 교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사님, 수리 잘 끝났습니다" "그런데... 비디오 데크 안에... 그게...” 긴장감이 흐르는 순간 목사는 담담히 말했다.


아, 그거요! 제가 봤습니다. 설교 준비에 필요해서요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지나가듯 말했다. “다음부터는 비디오를 본 뒤 꼭 빼놓거라” 그리고는 슬쩍 덧붙였다.


그 순간, 나는 목사가 아닌 아비가 되고 싶더라


이야기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난처한 순간에도 아버지는 거룩한 성직자가 아닌 아들 허물까지 덮어주는 아버지로 남았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클럽도 한 번씩 다녀 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래야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며.


그제야 전도사의 당찬 성품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이해가 되었다. 자기 위신을 지키기보다는 혹여 아들의 마음과 존엄이 상처를 입지 않을까 살폈던 아버지의 너른 품이 아들을 단단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저금통에 손을 대는 아들 버릇을 고치겠다며 경찰에 신고한 지인도 있다. 과연 누구의 양육 방식이 옳은 걸까?


양육 방식을 논하기 전,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누가 더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기억하고 있는가”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나중에 가서도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행복했던 추억만큼 소중한 자산도 없기 때문이다. 행복한 기억을 많이 가진 사람이 불행을 딛고 일어서는 힘도 강하다.


그러기 위해 가정은 세상 어느 곳 보다 안전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고, 자유롭게 상상하며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평가와 지적 속에서 아이들은 긴장하고 불안해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는 상상이 아닌 공상의 세계로 도피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은 둥지와도 같다. 둥지 안에서 새끼들은 부모의 돌봄을 받으며 자라다 때가 되면 하늘로 날아오른다. 둥지조차 비바람을 막아주지 않는다면 새끼가 어떻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가정은 바깥에서 얻은 상처를 회복하는 쉼터지 긴장 속에서 주변을 살피는 훈련소가 아니다. 또한 자녀가 실수했을 때 부모가 할 일은 위로와 지지지 지적이나 비난이 아니다. 그래야 실패 속에서 배움을 얻고 다시 일어설 힘을 기를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현관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현관은 그저 신발을 벗어두고 택배상자를 쌓아 두는 공간이 아니다. 그보다는 바깥에서의 역할과 무게를 벗어두는 장소다.


판사는 법복을, 군인은 군복을, 성직자는 가운을 벗어야 한다. 가정에서는 더 이상 법률전문가도, 교육전문가도, 도덕 전문가도 아닌 그저 가족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바깥세상의 냉기를 그대로 묻힌 채 들어올 때 가정은 균열되기 시작한다.


부모는 자녀를 훌륭히 키워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시기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게 해 주고, 거기서 얻은 느낌과 감정을 소중히 보관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이들이다.

냉혹한 경쟁이 살풍경한 시대, 가정마저 그 기능을 잃는다면 자녀가 설 곳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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