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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해"란 말에 인색한 이유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는 그대에게

by 장동혁

“사랑해”

가장 짧으면서도 달콤한 이 말을 당신은 오늘 몇 번이나 듣고 말했는가? 가장 최근 이 말을 한건 언제인가? 갑자기 생각에 버퍼링이 걸리지 않았는가? 사실 내가 그렇다. 우리는 이 말을 이유 없이 아껴두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일상에서 이 말을 자연스레 주고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 주로 용돈 줄 때이겠지만. 어쨌든 나이 들수록 ‘사랑해’란 말과 멀어지는 건 사실이다. 왜 그럴까.


유럽이나 미국 또는 남미 사정은 우리와 좀 다른 것 같다. “주떼므”, “띠아모”, “아이 러브유”는 일상에서 흔히 오가는 표현이다.




어느 모임서 들은 말이다. “그들이 사랑해란 말을 자주 하는 건 관계를 언제든 끝날 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들은 관계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점검한다고.


반면에 우리는 관계를 변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 번 맺은 관계는 의리로라도 가야 한다는 암묵적 약속이 있어 굳이 점검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결국 관계를 바라보는 의식 차이가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서양에서 관계는 둘이서 추는 춤과 같다. 춤을 추다 더 이상 합이 맞지 않을 땐 손을 놓고 무대를 떠날 수도 있다. “그동안 즐거웠어! 우리 그만하자!” 반면에 우리는 짓궂게 발을 밟고, 있는 힘껏 손을 잡아당기면서도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별 수 있어? 어차피 갈 거잖아, 버텨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아!” 그러다 보니 ‘사랑해’란 말이 필요 없다.

그런 면에서 서양 사람들에게 관계는 평생 회원권이 아니라 구독 서비스다. 서비스를 계속 이용할지 말지 주기적으로 평가하고 “사랑해”란 말로 점검해야 한다.


그에 반해 우리에게 관계는 건축물에 가깝다. 가볍게 시작해 구조가 세워지고 외부 시선이라는 외벽까지 쳐지면 웬만해서는 해체가 어렵다. 건물에 등기가 쳐지는 순간 때려 부수기 전까지는 과세 대상인 것과 같다. 그러다 보니 사랑해란 말이 소용없다.


“사랑해”란 말은 관계를 점검하는 중요한 도구다.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서로의 마음을 종종 확인해야 한다. 서양은 이를 당연하게 생각지만, 우리의 경직된 사고는 관계를 무한대로 만들어버린다. 그 결과 관계의 질량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관계도 연비가 있다. 관계를 통해 얻는 것보다 소모되는 게 많다면 관계를 점검해 봐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간 관계가 멈춰버릴 수도 있다.


빨갛게 녹이 슨 관계 안에서 다들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실망이 원망으로 그리고 절망으로 바뀐 지 오래다. 그럴 땐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먼저겠지만 경우에 따라선 정리해야 할 때도 있다. 맘먹고 대청소 한 번 하는 식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 않은가.


관계를 정리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이별에는 자신의 부족함뿐만 아니라 함께한 시간과 언약의 덧없음까지 인정해야 하는 고통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미래를 설계하고 선택할 권리를 다른 사람 손에 넘길 수는 없다.


관계를 정리한다는 게 꼭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 진액을 쏟은 채 엉겨 붙어 나를 잃는 것보다, 관계를 정리하며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게 남은 인생에 유익할 수도 있다.


관계를 유지와 단절이라는 이분법 안에 가두지도 말자. 관습적인 사고다. 그 사이에 얼마든지 대안이 있다. 관계가 해체되었다고 원수로 지내란 법도 없다. 색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재설정할 수도 있다.




관계를 점검하기 전 세 가지를 기억하자. 사람을 위해 관계가 존재하지 관계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그리고 관계의 해체는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마지막으로 “사랑해”라는 말은 관계를 확인하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관계에 활력을 주는 비타민과 같다는 점을.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 그 시간만큼 그 대상을 위해 죽어가는 것이다. 관계를 담보로 나를 가두고 퇴보하게 만드는 걸 위해 죽어가는 것보다 무의미한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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