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토프 백작과 삼총사가 보야로스키 주방에 모였다. 백작의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프랑스 남부 요리, ‘부야베스’를 만들기 위해서다.
선홍빛 토마토와 바질의 신선한 향, 반짝이는 랍스터의 껍질.
그에게 이 요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잃어버린 자유와 희망을 되찾기 위한 조용한 혁명이었다.
알렉산드로 로스토프 백작.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그는 종신 호텔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하루아침에 스위트룸에서 다락방으로, VIP 고객에서 웨이터로 전락한 그의 삶은 누가 보아도 비극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현실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교양과 부드러운 매너로 호텔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고, 친구가 되어갔다.
그중에는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호텔에서 생활하던 소녀 니나도 있었다. 호기심이 많고 활기 넘치는 니나와 백작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세월이 흘러 니나는 혁명가로 성장했고, 어느 날 어린 딸 소피아를 백작에게 맡긴 채 혁명의 현장으로 떠나버린다.
졸지에 아버지가 된 백작.
좌충우돌 끝에 동료들의 도움으로 소피아를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키워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파리에서 연주회를 가지는 날, 무대에서 소피아는 아버지를 이렇게 소개한다.
건배를 제안하고 싶어요. 제 수호천사이자 아버지이자 친구인 알렉산드로 로스토프 백작을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서 장점만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나는 마지막 문장에서 멈춰버렸다. “모두에게서 장점만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 고백하건대, 나는 그 반대에 가깝다.
장점보다는 결점을 먼저 발견하고, 남의 강점을 인정하기보다는 나 자신과 비교하기 바쁜. 왜 이렇게 쉬운 일이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걸까?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그런 시선을 보내준 분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 우리 집에 머물던 이모가 말했다.
우리, 아침마다 30분씩 책을 읽을까?
다음 날부터 나는 이모와 함께 아침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펼치면 코끝을 스치는 포도 향, 차분한 새벽 공기, 그리고 함께 읽는 보람과 즐거움. 그때 나는 그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끽했다.
이모는 내가 이야기를 만들고 남들에게 들려주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나는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 100권을 섭렵했고, 여전히 책을 읽고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또 한 사람, 초등학교 1학년 담임 황인희 선생님.
6학년 생일날,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작은 상자를 하나를 건네주셨다. 놀랍게도 현미경이었다. 손잡이를 잡고 박스에서 현미경을 꺼내며 느꼈던 짜릿함을 잊을 수 없다.
아마도 선생님은 내가 『소년중앙』에 등장하는 광학기기에 푹 빠져 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는 틈만 나면 현미경을 들고 이층 서재로 올라갔다. 햇빛에 반사되어 무지갯빛으로 번지는 잠자리 날개를 들여다볼 때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 현미경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내 관심사와 가능성을 알아봐 주었고, 그것을 북돋아 주고 싶어 했다는 증거였다.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는 결국 ‘애정 어린 시선’의 힘에 대한 증언이다.
그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꽃 필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그 사람이다.
환대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이는 첫눈처럼 푸근한 사람이고, 경계하고 평가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는 그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지경 속 같은 세상, 진짜 봐야 할 것을 보기 힘든 시대다.
나조차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삶 속에서, 다른 이의 장점을 발견하고 격려하는 일이 가당키나 할까 싶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에게 로스토프 백작이 될 수 있다면?
그 시작은 ‘나 자신’에서 시선을 거두는 것이다.
얼마든지 나를 꾸미고 치장하되, 현관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를 잊자. 그리고 타인에게 온전히 관심을 쏟아보자. 관계 속에서도 나를 의식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의 장점을 발견하고 꽃 피우게 하는 작은 혁명을 시작할 때다. 그 변화는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도 있고, 뜻밖에 내 삶을 바꿀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