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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관계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관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법

by 장동혁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고, 서로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기싸움을 벌일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온 힘이 소진되고, 눈조차 마주치기 싫어진다.


갈등이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숨 막히는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하루라도 빨리 관계에서 벗어나야 살 것 같다.

소개해 준 사람을 탓해보고 사람 보는 눈 없는 나를 원망도 해본다. 답은 오직 관계를 끝내는 것 밖에 없어 보인다. 그 사람만 사라져 준다면 온갖 근심이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것만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건 유토피아나 이데아 같은 환영에 불과하다. 완전한 자유란 절대자인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에 발을 담글 수는 있어도 안에 머물 수는 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자예프는 말한다. 인간이 자유를 꿈꾸지만,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무언가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독재자 같은 상사의 속박이 싫어 퇴사했지만 돈의 노예가 되어 있고, 전쟁 같은 사랑에서 빠져 나와보니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자유를 외치던 사람이 그 신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너무도 빈틈없고 집요해 그 어디에도 완전한 구원은 없다.


베르자예프는 이를 인간의 “노예성”이라 불렀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불안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붙잡을 것 하나 없고 방향을 알려줄 표지판 하나 없는 망망대해.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김훈은 이를 <허송세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짧은 줄에 목이 매여서 이념, 제도, 욕망, 언어, 가치, 인습 같은 강고한 말뚝에 묶여 있다. 짧은 줄로 바짝 묶여서, 괴로워하기보다는 편해하고 줄이 끊어질까 봐서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에 속하려 하고, 새로운 관계, 새로운 집단, 새로운 신념을 찾아 헤맨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지긋지긋한 관계를 끝낸 뒤에는 훨훨 날아갈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문제를 또 다른 관계에서 마주친다. 나를 옭아매는 관계에서 달아난다고 해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실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온전한 자유는 풀 한 포기 없는 광야와 같다. 태양이 내리쬐는 광야에서 견딜 초인은 어디에도 없다. 그 광야에서 손바닥만 한 그늘이라도 드리워 주는 나무가 관계다. 결국, 우리는 관계라는 그늘을 찾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관계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기독교는 너무 간단해 허탈하기까지 한 답을 제시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신에게 100% 예속되어야만 100% 자유로워진다는 역설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적 해법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온전한 "자유”는 신의 것이기에, 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을 닮아갈 때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냐고, 속박되는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냐고 항변해 보지만, 제대로 해보기는 했냐고, 그렇게 해보고 오라고 한다. 하지만 자유보다는 종교라는 굴레 하나 더 얻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또한 인간의 노예성일 것이다.


코끼리 냉장고에 넣기 식의 기독교 해법과 달리, 불교는 정반대의 길을 제시한다. 멈춤 없는 수행과 해탈을 통해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아닌 이상, 그것 또한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보리수나무 근체에도 가기 전에 세이렌의 유혹에 무릎을 꾸로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은 무엇일까?


베르자에프는 그나마 기독교적 해법에 실마리가 있지 않겠냐고 말한다. 관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 말이다.


관계를 맺되 얽매이지 않는 것. 그리고 신념을 가지되 그것이 전부라고 믿지 않는 것. 어딘가에 속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지배하도록 두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뜨거운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베르자예프는 이를 자유를 향한 끝없는 "투쟁"이라 불렀다.


자유함이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보다는 노예성이라고 하는 미몽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투쟁에 가깝다.




인간관계에 적용해 보면, 관계를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예속되지도 않는 상태가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관계의 정원’이다.


이를 위해서는 불필요한 관계를 가지치기하고, 아집을 포함해 나를 옭아매 성장을 방해하는 덩굴을 제거해 관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할 것이고, 자유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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