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flesh and blood

정체성을 받치는 두 기둥

by 장동혁
“이해할 수 있겠나? 젊을 때는 심각한 실수를 할 수 있데이. 나쁜 사람을 믿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난 니를 가져서 무척 감사했다. 나와 결혼해 준 이 아버지에게도 감사하고...”
-<파친코> 중-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속한 혈통과 공동체 또한 우리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영어 표현 Flesh and Blood가 이 두 가지 측면을 잘 보여준다.


Flesh가 우리가 타고나는 것과 선택할 수 있는 것들, 즉 개성과 행동을 의미한다면, Blood는 선택할 수 없는 것들, 즉 혈통과 가족, 사회적 소속을 뜻한다. Flesh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현실이라면 Blood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이나 가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될 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이 두 요소 사이에서 균형을 잃을 때다. 특히 한국과 일본처럼 혈통과 소속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Flesh보다 Blood에 묶이는 경우가 많다. 국적 취득 요건만 봐도 그렇다. 태어난 곳을 기준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과 일본은 부모의 국적이 결정적이다. 혈통 중심 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무엇을 이루었느냐보다, 어디에서 왔느냐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때로 Blood에서 비롯된 가치나 신념은 우리 삶을 가공할 무게로 짓누르곤 한다. 이는 마치 가볍고 투명한 물이 깊어질수록 압력도 증가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현실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소설 《파친코》 속 노아의 삶이 잘 보여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어떻게 아버지를 배신할 수가 있냐고요”
“엄마가, 엄마가 제 인생을 앗아갔어요. 전 더 이상 제가 아니에요”
노아가 손가락으로 엄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노아는 돌아서서 기차역으로 뛰어갔다.
-<파친코> 중-

노아는 총명하고 성실한 소년이었다. 그는 일본 사회에서 성공해 인정 받는 것이 꿈이었고, 가난에서 동포를 구원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자신에게 한인 야쿠자 한수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순한 출신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증오하던 부류의 피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를 무너뜨렸다.


무엇보다 자신이 거룩한 계보가 아닌, 욕정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가족을 떠나 나가노로 숨어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일본인으로 살면서 과거를 지우려 했지만, 혈통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과거를 부정할수록 내면의 갈등은 깊어졌고, 결국 어머니와 다시 마주한 순간,


“차라리 업장에서 만나게 다행”


이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현세뿐만 아니라 혈통, 신분, 도덕, 영적 세계가 중첩되며 가중된 무게와 자기 자신마저 속여가며 살아야 했던 신분 세탁자로서의 삶의 고통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노아의 비극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오직 Blood로만 정의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Flesh—즉, 자신의 선택과 삶의 방식—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출신에 의해 존재가 결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Flesh와 Blood, 어느 쪽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건강한 삶의 시작이다.


노아와 달리, 그의 동생 모자수는 Flesh의 가치를 받아들였다. 그는 혈통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며 삶을 개척했다. 노아가 자신의 출신을 부정하다가 파멸했다면, 모자수는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나의 삶을 Flesh로 증명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Blood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노아가 방주를 지어 세상을 구하려 했듯, 소설 속 노아 또한 동족 계몽과 구원이라는 위대한 꿈을 품었다. 하지만 그 꿈이 혈통 중심의 이상에 갇혀버린다면 진정한 구원은 불가능하다. Flesh와 Blood가 균형을 이루고 통합될 때만이, 인간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까지 구원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을 지어준 영적 아버지 이삭도, 아이를 가진 채 버림받은 여자를 아무 조건 없이 품을 정도로 Flesh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고귀하다.


우리는 누구인가?


혈통과 소속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기 쉽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어디 출신인지가 때때로 내가 누구인가 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다움은 Flesh와 Blood, 즉 개성과 관계의 조화에 있다. 우리가 누구의 피를 이어받고 어디 속해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느냐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


소설 속 노아의 비극은 이 균형을 잃을 때 우리 정체성이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자신에게 운명 지어진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천 년 전, 한 유대 청년이 혈통과 전통에 얽매인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겉과 속이 다른 무덤”이라 맹비난했던 것도, "내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진짜 생명이 없다:라고 선언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현실 세계에 뿌리내린 건강한 정체성은 Flesh와 Blood가 조화를 이를 때 비로소 완성된다.


P20240717_185421311_6C3E6EE2-C56F-4E8C-B431-1178C070CD07.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카버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