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에 대한 주류의 폭력 이야기라면 진부하다. 통속소설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맨부커상의 후광은, 글 속에 숨겨진 보화를 찾아보라는 듯 유혹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내 첫 느낌이다.
기이하고도 서글픈 형질의 변화를 꿈꾼 한 여자의 몰락은 너무도 평범한 것들에서 시작된다. 이름부터가 ‘영혜’다. 연배 좀 있다면, 주소록에 하나쯤 있을 법하지 않은가. 코가 좁은 구두를 신고 소개팅에 나온 남자도 평범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녀를 택한다.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 것 같단다. 거기다 “특별한 하자가 없을 것 같아서”란 말도 덧붙인다. 아무리 그래도 남녀의 만남인데 이래도 되나 싶었다.
어쩌면 이토록 평범한 도입부는 뒤에서 일어날 반전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장치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이 흘러가던 어느 날, 그녀 삶에 불길한 전조가 스미기 시작한다. 이어서 언젠가 그녀 의지를 뚫고 삐져나올지 모를 무언가도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녀도 모르게 뿌리내린 폭력성이다.
우물처럼 컴컴한 무의식 위로 어른거리는 그 기운은 꿈속에서 끔찍한 영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의 맹수적 본능이 얼마나 혐오스러웠던지, 잠에서 깬 그녀는 손톱과 이빨이 여전히 온순한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자 그녀는 되풀이되는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듯 채식을 결심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채식은 그녀의 가슴을 날카롭게 만들어버린다. 유일하게 공격성이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그녀가 안심했던 부위이다. 이 뜻밖의 변화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짓밟아버리는 합병증처럼 그녀를 공포로 몰고 간다.
폭력은 어떻게 대물림되는가.
폭력성에 대한 그녀의 힘겨운 저항은, 오히려 가족의 집단 무의식 속에 봉인돼 있던 괴물을 불러낸다. 어느 날 갑자기 재현된 아버지의 폭력이다. 평소 소통이 원활치 않아 왕래가 드물던 아버지가 격분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근육이 기억하는 방법, 폭력이다. 격발 된 부친의 폭력에 위태롭게 버티던 영혜의 자아에 금이 간다.
‘월남에서 죽인 베트콩 일곱 명’으로 시작되는 무용담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을 정도로 폭력에 둔감한 아버지에게, 자기 딸을 문 개쯤은 거리낌 없이 제거할 대상에 불과했다. 아니, 그동안 눌러왔던 공격 본능을 슬쩍 풀어놓을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사립문 앞에서 가족과 정겨운 눈길을 나누었을 개는 그날로 오토바이에 묶인 채 피눈물을 흘리며 마을을 돌아야 했다. 참혹하게 죽어간 그 개는 폭력성을 공유한 부녀의 희생양이었다.
이것이 대물림이다. 폭력은 가족 안에서 부모와 자녀가 교류하는 과정에서 전이된다. 행동과 가치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폭력 또한 패턴이 되어 반복된다. 모든 폭력이 그렇지만 그중에서,
가족 간에 벌어지는 폭력은 가하는 주체나 당하는 대상이 서로 대체될 수 없어 내상은 깊고 탈출구는 좁다.
영혜네 집은 폭력이 습관적으로 행해지던 역기능 가족이었다. 아버지의 폭력 아래 최소한의 안전조차 보장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언니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알아버렸다. 그런 언니는 아버지 술국을 끌이며 안위를 보장받았고 남동생은 자신이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는 돌려줌으로써 직성을 풀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던 영혜는 도망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받아낼 뿐. 수동공격적인 그녀 태도가 오히려 아버지를 더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가계에 흐르는 폭력성은 구성원 중 가장 낮은 데 위치한 영혜에게로 흘렀고, 무표정한 그녀의 인상 뒤로는 발아만 기다리는 폭력성에 대한 치열한 저항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니는 그런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 죄책감은 그녀를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내몰았다. 자신을 돌보는 법을 잊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 하지만 그 희생조차 끝없는 공허를 채우지 못했다.
어느 날 불거진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그녀의 자아는 급격히 와해된다. 그리고 새로운 정신세계가 형성된다. 그것은 기이하고도 애처로운 변화였다.
그녀는 폭력의 소산을 통해서만 생존이 가능한 동물의 속성을 거부한 채 의연하게 버티고 선 나무가 되려 한다. 그리고는 식음을 전폐한다.
식물이 인간 하위에 위치한다고 믿는 건 오만한 인간뿐이다. 생태계에서는 식물도 동물이나 균류와 함께 엄연히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녀는 인간의 오해와 폭력에 항의라도 하듯, 나무를 동경한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 한강, 《채식주의자》
그래서일까. 장맛비에 젖어 검게 변한 가로수의 육중한 기둥이, 때로는 공포로 다가온다.
한 편, 영혜의 기이한 정신세계가 탐미적 예술 행위에 집착하는 형부의 욕망과 만나며,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형부에게 식물 이미지는 단순한 감각적 욕망의 대상이지만 영혜에게 나무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인간성을 벗어나려 했다.
폭력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을까
폭력의 대물림이 슬픈 이유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생명을 가진 것에 폭력을 가하는 행위는 익숙하지 않으면 범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흐름을 멈출 수는 없을까? 다행히도, 가정 폭력의 대물림은 숙명이 아니다. 그것을 끊어낼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무엇보다 폭력의 본질을 직시해야만 한다. 폭력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지속된 폭력은 너무도 쉽게 ‘정당한 행위’로 포장된다. "그래서 네가 사람이 된 거야!"
우리는 그것이 학습된 반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성찰하는 것이다. 폭력은 단순히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전이된다. 그리고 그 피해는 가해자와 상대방뿐만 아니라 가족 그리고 사회에까지 미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영혜가 그런 것처럼.
마지막으로 폭력의 대물림을 끊어내려는 노력은 가해자나 피해자만의 몫이 아니다. 그 경험에 동참했던 주변인 모두 해결에 동참해야 의미가 있다. 때로는 기억 속에 묻어둔 그때, 그 순간의 기억을 꺼내야 할 수도 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2차 가해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너도 알잖아 그래서 우리가 살아난 거야!" 가해자의 이러한 자기방어적인 말은, 맹견이 이를 드러내는 행동과 다르지 않다. 피해자의 기억 저편에 묻혀있던 비참한 장면들이 망령처럼 되살아날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폭력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영혜 내면에서 발아하 폭력성은 외부가 아닌 그녀 자신으로 향했다. 폭력의 대물림을 끊는 길이 숙주인 자기 자신의 소멸밖에 없다고 믿었던 것일까.
관계 나무에 열리는 가장 불길한 열매가 폭력이라면, 그 대물림을 끊는 것은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