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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할 권리

막대하는 상사 앞에서 미소 짓는 그대에게

by 장동혁

“치나스키 군은 모든 것에 반항하죠”

“어떻게 살아남을 건가요?”
“모르겠네요 벌써 지쳐서”
-<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당신은 “무책임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언제인가? 아니,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그 말에 어떤 기분이 들었나?


심한 독감에 걸린 김대리는 스마트폰을 겨우 집어 들어 회사에 전화를 했다. "아무래도 오늘 출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온몸이 쑤시고 열이 펄펄 끓어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앓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또 오 팀장이다. 오전에만 세 번째다. 간신히 몸을 끌고 전화를 받자마자 팀장은 당연하다는 듯 자료를 요청한다.


"김대리, 그 있지? 회사 브로셔 2차 시안 메일로 보내줘 봐!"


노트북을 켜 겨우 자료를 찾아 보내고 다시 누웠지만, 통화 끝에 자신이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지금 제가 너무 아프니 더 이상 전화하지 않으셨면 좋겠습니다.”


당연한 말인데도 김 대리는 혹시 무책임하게 보이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 때문에 정작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이처럼 우리는 종종 “책임감”이라는 감독관 앞에서 눈치 보며 하역하는 인부가 되곤 한다. 책임감 강박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성실히 공부하라고, 가정에서는 착하고 얌전하게 행동하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말들 뒤에는 순응적인 사람이 사회생활 잘할 거라는 인식이 숨어 있다.


군대에서 책임 강박은 정점을 찍는다. 입대하며 지급받은 소총은 제대할 때 반드시 반납해야 한다. 야외 훈련 중 소총이 보이지 않아 식은땀 흘린 경험, 남자라면 한 번쯤 있을 거다.


이런 문화 속에서 한국 사회는 책임감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왔고, 우리는 책임감 일등 국민이 되어버렸다. 입사 면접에서 가장 먼저 입증해야 할 덕목도 ‘책임감’ 일 것이다.


얼마 전 한 영상에서, 물난리가 나 물이 가슴팍까지 올라오는데도 흙탕물을 헤치며 출근하는 직장인 행렬을 본 적이 있다. 다들 가방을 머리에 인 채 유유히 전진하는 장면을 보며, 감전보다 무서운 게 무책임이란 낙인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80년대 일이다.


책임감하면 나 또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강의 요청이 들어오면 발표자료를 메일로 보낸다. 이때 나에게도 첨부하는 걸 잊지 않는다. 그것도 부족해 강의 당일 USB를 들고 가 30분 전에 확인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런 우리에게 찰스 부코스키는 묻는다.


“그게 누구를 위한 선택인가?”


미국 작가 찰스 부코스키의 분신이자 소설 속 주인공 치나스키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그는 한마디로 무책임의 화신이다. 술이 덜 깬 채 단추가 덜렁거리는 셔츠를 입고 면접장에 나타나는가 하면, 자신을 기계쯤으로 여기는 상사의 지시에 대놓고 삐딱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다.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면접관이 그에게 묻는다.

“최선을 다할 건가요?”

면접장을 나서며 치나스키는 생각한다. 하마터면 "예"라고 답할 뻔했다고. 맘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건 자기 존엄을 해치는 일이란다. "가족 같이 일할 젊은이 구함"은 허울이고, 사장 배를 채우기 위해 노새처럼 부릴 거라는 걸 그는 알았다. 그런 업주에게는 그에 맞게 대응해 주는 게 그의 철학이다.


물론 우리는 치나스키가 될 수 없다. 잡일을 하며 전국을 떠돌게 아니라면. 그의 소설 제목 <팩토텀>(Factotum)은 ‘잡부’라는 뜻이고, 실제 부코스키는 그레이 하운드에 몸을 싣고 미국 전역을 돌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틈틈이 글을 읽고, 글을 쓸 것” 그렇게 해서 '천박함의 미'와 '더티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루저들의 히어로'가 탄생한다. 참고로 그의 소설은 서점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하는 책이라고 한다.


치나스키처럼 떠도는 삶을 각오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지금 외부의 기대에 끌려다니며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하루는 나는 뒤로 감춘 채, 그들의 기대와 관심에 집중하느라 애쓰는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책임감’이라는 이름 하에 스스로를 속박하면서 살아간다.


부모로서, 배우자로서, 자식으로서 우리가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부모라서, 배우자라서, 자식이라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다. 늘 맞춰주고, 챙기고, 배려하는 역할을 해왔다면, 한 번쯤은 그런 대우를 받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가 실망하거나 서운해할까 봐 무리해서라도 맞추려 노력한다. 회사가 어렵다는 말에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비아냥대는 상사에게 억지 미소를 짓기도 한다.


우리는 정말 이 모든 책임을 져야만 할까?


책임감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책임감과, 타인의 시선에서 강요된 책임감.


진짜 책임감이란 타인의 기대를 무조건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제대로 지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상사에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관계에서 지나치게 희생하는 역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나의 감정과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이런 작은 선택들이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는 힘이 된다. 그리고 책임감은 이런 사람을 흔들지는 못한다.




찰스 부코스키가 다시 묻는다.

“무책임하다는 말, 들어본 적 있는가?”


내 기억엔 없다.


그가 다시 묻는다. 그래서 행복했냐고.


글쎄다...


그가 귀에 대고 조용히 조언한다.

무책임하다는 말, 한 번쯤 듣는 걸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 해봐서 그렇지 그렇게 큰 일은 아니라고.


우리에게는 책임질 의무가 있지만 무책임할 권리도 있다. 모든 것을 짊어질 필요는 없다. 과도한 책임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느 지방 초입에 거대한 표지석이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착하게 살자”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지방 관청에는 '착하게 살기 운동' 담당자까지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착하게 사는 걸까?”


그때 찰스 부코스키의 묘비가 떠올랐다. 거기에는 단 두 단 어가 새겨져 있다.


"Don't Try"


그가 떠나며 우리에게 남긴 말. "애쓰지 마라!" 이 말은 단순히 나태함의 선언이 아니다. 내 길 아닌 데도 따라 가느라 애쓰고, 인정받으려 애쓰고, 비위 맞추느라 애쓰고, 불안과 걱정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느라 힘쓰는 우리에게 전하는 위로다.


그저 영웅을 추앙하며 따라마 가는 우리에게 부코스키가 말한다.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하나쯤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무지 말릴 수 없는 사람
프랑스에선가, 음주방송 때문에 쫓겨나기도 했다
철저히 비주류의 삶을 사는 '치나스키'에서 영감 받아 애쉬크로프크가 제작한 '헨리 치나스키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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