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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우리에게 유치함을 허한 까닭

설국에서 발견한 인간 관계의 자화상

by 장동혁
떨어지기 싫어서인 것도 아니고 헤어지기 싫어서인 것도 아니지만, 고마코가 자주 만나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버릇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고마코가 안타깝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살아 있지 않은 듯 한 가책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
- <설국> 중, 가와바타 야스나리


한 해, 한 해 먹던 나이가 어느 순간 들어간다고 느껴질 때가 온다. 그때부터 나이는 떡국에 하나씩 담긴 그것과는 다르다. 하나씩 디지털로 더해지던 것이 아날로그로 불어난다. 흔히 그걸 꺾어졌다고 표현한다. 그게 마흔이 넘어가면서부터일 수도 있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면서부터 일수도 있다. 그 현상은 긴 무더위 뒤, 어느 날 아침 들어선 가을 기운과도 같다.

그렇다고 나이 들어가는 게 마냥 우울한 일만은 아니다. 경험이 쌓이며 여유가 생긴다. 감정 기복이 줄고, 자기 발 뻗을 자리 정도는 눈대중으로도 알아본다. 무엇보다 관계의 생애를 보는 안목이 생긴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기대를 안 한다. 그만큼 실망도 크기 때문이다. 관계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유명한 소설 첫 문장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세 문장이 독자를 눈의 나라로 초대한다. 거기에는 나이를 먹고 있는 한 여인이 나이 들어가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무위도식하며 보지도 않은 것을 비평하며 살아가는 동경의 한량 시마무라도 그 터널을 지난다. 이어 등장하는 눈의 고장에는 어쩌면 그런 그의 삶을 바꿔 놓을지도 모를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작가를 잘 아는 독자라면 그런 일이 일어날 일은 애초에 없을 것임을 안다. 하나 그걸 알 길 없는 여인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그를 기다린다. 수세미 속처럼 복잡한 그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맘이 동할 때만 방문해 그녀를 흔들어 놓는다.




오욕칠정에서 싹트는 인간의 관계는 위험하여 조심스럽다. 건강한 변화나 성장 같은 열매도 내지만, 부산물도 만만치 않다. 둘이 맺은 인연이 오색으로 물드는가 하면, 뜻하지 않은 분노가 그 끈을 살라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싸늘히 식어버려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그런 관계의 속성을 잘 아는 도시의 중년남은 시골 온천장 게이샤의 연정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럴수록 여자의 감정은 살아서 펄떡인다. 자신에게 관심 주며 관계의 물꼬를 튼 남자에게 충실히 반응하며 자신을 열어 보인다. 천성이 깔끔하고 살뜰하다는 걸 은근히 드러내 보이는가 하면, 술 취한 날 밤, 문을 열고 들어와 쓰러질 듯 안기기도 한다. 그도 아니면 고개를 숙인 채 시위하듯 머리꽂이로 다다미를 쑤신다.


설국의 여주인공 고마코의 실제 모델 마츠에


익숙해져만 가는 남자를 이끌어 자기 삶의 체취가 묻어 나는 곳에 데려가 보기도 하지만 남자는 요지부동이다. 심지어 대놓고 헛수고라고 말한다. 세 번의 만남 동안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둘의 관계는 구름 낀 하늘에 비는 내리지 않는 밀운불우(密雲不雨) 요, 온갖 시도에도 결실을 보지 못하는 불임(不姙)의 형국이다.


플랫폼 너머 서있는 고마코가 한촌(寒村) 가게의 잊힌 채 놓인 과일 같아 보인다고 시마무라가 생각할 때나, 그를 만나기 위해 빌려 입을 옷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고마코가 고백할 때는, 지면 밖에서 지켜보는 입장임에도 애틋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당사자라면 애처로움은 배가 될 것이다.


평행선을 달리는 그들을 보다 못한 운명의 신이 개입한 것일까. 불이 난 고치 창고가 둘의 관계를 정리해 준다. 호기심이 동한 시마무라도 불타오르는 창고로 다가가 보지만, 생의 의지로 충만한 주민들에 밀려 허위허위 멀어진다. 어쩌면 그때 이미 그의 마음은 연분 같지 않은 연분을 일장춘몽으로 여기며 돌아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설국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야기는 불이 난 고치 창고에서 떨어진 요코를 고마코가 부둥켜안고 울부짖으며 끝이 난다. 설국을 영문으로 번역한 사이덴 스티커는 결국 그녀는 요코를 자신의 과중한 운명으로 받아들여 맹목적으로 돌보며 시골 온천장에서 신세를 망쳐갈 것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춤선생 아들 유키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와 달리 땀과 눈물로 얼룩진 삶 속으로 뛰어들기보다는 그저 관망하며 촌평만 일삼는 도회지 한량에게 인생은 그저 잠시 반짝이다 사라질 불빛일 뿐이다. 그런 인생들이 만들어대는 관계는 덧없고 허무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늘 과하고 요란한 인간보다는, 느리지만 성실히 변화하며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연과 교감하는 데 진지하다. 또한 찰나의 살가움 뒤에 긴 권태감을 안겨주는 인간의 살갗보다는 짧지만 충만하게 살다 죽어 바스러진 곤충의 껍질에 닿는 게 깔끔하다.


국경의 터널을 지나 현실로 돌아온 그는 또다시 익명성을 획득하게 될 터이다. 그리고 어떤 관계도 마다한 채 서늘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때가 되면 고마코와 경탄하며 바라본 은하수 어딘가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자신이 진정 살아있는지 궁금해질 때면 관심거리를 찾아 떠나면 그만이다.


이 땅에 인간 욕망으로 오염되지 않은 설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마치 영원할 것처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과 그들이 맺어대는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살다 보면 인생이 무상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이는 마치 밸런타인데이 다음날 편의점 할인 매대 위에 놓인 초콜릿만큼이나 유치해 보인다. 심지어 인간에서 비롯된 모든 게 추해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낯을 가린다.


대신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은 무언가와 연결된다. 그게 취미이기도 하고 반려동물일 때도 있다. 이거라면 그런대로 살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영원한 자유인으로 남을 게 아니라면 주의할 점이 있다.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기능도 쓰지 않으면 퇴화된다는 사실을. 거기다 세월 따라 진행되는 퇴행과 맞물리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미우나 고우나 사람은 사람과 연결될 때 가장 빛이 난다. 그리고 우리를 끝없이 유치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지만 신을 닮아가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과 거리를 둔다는 건 결국 자신과도 소원해지는 길이란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느 요양보호사의 말이다. “양로원 하면 머리가 하얗게 센 호호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 떠는 장면이 떠오르죠?” “아니에요” “다들 말없이 한 방향만 보고 있어요” “창밖을요”


신이 창조한 그림 같은 세상을 추하게 만든 주범이 인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유독 조화보다는 갈등으로 치닫기 쉬운 인간 관계도 한 몫한다. 그런 인간들의 세상을 신은 몇 번이고 쓸어 엎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을 추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지만, 유치함을 승화시켜 신에게 다가가려는 것도 인간인 것을.


설국의 배경, 니가타현 관광 소개
설국의 배경, 니가타현 관광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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