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의 위험성
‘아무튼 아버지와 저는 그렇게 달랐고 다르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위험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한 촌부가 묻는다.
"어찌해야 자식 놈 잘 키웠단 소리를 들을까요."
현자가 답한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자제분을 그저 잠시 머물다 갈 손님처럼 대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게서 비롯되었으니, 자식은 내 뜻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부모자식 간 비극은 싹튼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만큼 부자간 갈등을 세밀히 보여주는 작품도 드물다. 죽음을 앞두고 카프카는 자신의 삶이 회한과 아쉬움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막연한 불안과 고질적인 두려움의 원천이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면밀히 살핀 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마치 소장을 방불케 하는 그의 편지는 우리가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워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특별한 감수성을 갖고 태어난 카프카는 무심한 데다 뭐든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아버지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는다. 늦은 밤 보챈다며 카프카를 베란다에 가두거나, 수영장에 무지막지하게 던져버린 사건은 그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카프카는 자신이 철저하게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감정을 내면화한다. 그런 그의 특성은 작품세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암울한 기운이나 불안, 소외감 등의 정서를 표현하는 'kafkaesque'(카프카적인)이란 용어가 대표적이다.
그의 글에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작가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거나 아니면 자기 세계에 갇혀 성장하지 못한 나약한 인간의 표상으로 보거나.
이 반응은 부모자식 간 애착관계 상태를 보여준다. 애착경험이 충분해 제대로 독립을 이룬 사람은 그다지 공감 못하는 반면, 그게 부족해 어린 시절을 상실로 여기는 사람은 그에게 깊이 공감한다. 나의 경우 문장 하나하나가 와서 닿았고, 오랜 기간 씨름해 왔던 문제들이 거기 담겨 있어 놀랄 정도였다.
나 또한 내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의 정체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나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 같은 세계를 보도록 몰고 간 어머니의 바람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렇다면 재능을 다 펼치지도 못한 채 회한 가운데 죽어간 카프카가 입은 피해는 무엇이고, 그에 대해 아버지는 유죄일까. 유죄라면 죄목은 무엇일까. 카프카의 심리적 대리인이 되어 그 쟁점을 짚어본다.
반갑습니다. 헤르만 카프카 씨.
일면식도 없지만 왠지 당신이 낯 설지가 않네요. 그건 아마도 의뢰인이 들려준 내밀한 이야기가 마치 나 자신이 겪은 일인 것 마냥 생생했기 때문일 겁니다. 극 담담히 들려준 이야기가 어찌나 실감 나던지 그저 남의 일로만 느껴지지 않더군요. 그 이유는 끝까지 평행선을 달렸던 비운의 부자는 가고 없지만, 또 다른 헤르만과 프란츠가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잠깐 돌아앉아 보세요!
여전히 당신은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한 죄밖에 없다고 호소하시는군요. 하지만 보세요. 당신이 주장하는 최선이 프란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요. 막연한 불안과 낮은 자존감, 자기혐오 그리고 우울감. 당신 아들이 매일 마주쳤던 증상들입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그건 양육자의 무조건적 수용과 인정, 친밀감 부족이 원인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이 있다면 고급 정밀시계를 장인이 아닌 수선공에게 맡긴 조물주에게 있다고 주장했더군요. 그것도 모자라 영롱한 진주도 까칠한 모래가 주는 상처의 아픔을 참고 견뎌낸 결과물이 아니겠느냐고 반문까지 했고요.
저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군요. 생각해 보세요. 그 재능이 따뜻한 권위와 배려심을 가진 양육자 아래서 꽃피었다면 그 열매가 얼마나 풍성할지를요.
너무 당연해서일까요? 당신이 간과한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죠. 우리 모두는 다르게 태어납니다. 그런데 당신 아들 프란츠는 훨씬 더 특별한 다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신은 하필 그런 아이를 무심한 데다가 매사를 단순하게만 바라보고 밀어붙이는 당신 같은 사람에게 맡기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귀한 원석이 보석 세공기(細工機)가 아닌 투박한 절굿공이에 놓인 건 숙명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네요.
그리고 당신은 인간이 행복하려면 육체적 욕구 외에도 관계가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더군요. 추위나 배고픔보다 두려운 건 지옥문 앞에 서는 것뿐이라고 확신하는 당신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사흘만 굶어봐라, 그까짓 관계나 감정 타령이 나오는지”
당신은 사람의 마음 같은 게 마른 빵조각 보다 나을 게 뭐냐고 묻고 싶겠죠? 하지만 프란츠는 달랐습니다. 당신은 그 다름으로 인해 발생할 문제를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했습니다.
무지가 죄라고요?
이제 무지 뒤에 숨으려 하시는군요. 아니요. 무지가 죄가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 이게 최선인지 의심해 보는 걸 미뤄온 게으름이 죄라면 죄일 겁니다. 분명 당신과 프란츠 사이에는 극적인 다름이 존재했고, 그 다름으로 인한 피해는 오롯이 프란츠의 몫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는 당신과의 관계를 깨고 나와야 했습니다. 자아 독립을 위한 심리적 친부살해 말입니다. 하나 그러기에 프란츠는 너무도 소심했고 순응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상대인 당신이 너무도 강했지요. 그의 눈에 비친 당신 모습은 어떤 도전에도 끄떡 않는 강인함과 정복 의지로 무장된 독재자였으니까요.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어린 프란츠에게 당신이 얼마나 무심했는지 들려 드리죠. 어린 시절 경이로움에 빠져 세계를 탐색해 가던 그에게 당신은 늘 무미건조한 잣대를 들이댔더군요. 물론 그 잣대마저 당신 기분에 따라 달라졌고요. 아이다운 상상력에서 나온 작품들은 당신 앞에서 하나 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기 일쑤였고, 나중에 가서는 그런 반응이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절망으로 내몬 건 당신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하는 저주와도 같은 암시였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그 사람의 육체가 아닌 언행과 살아가는 거란 말이 있습니다. 무심코 던진 말이 상대에게 달라붙어 어떻게 삶에 영향을 주는지 당신이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결국 실패를 예견하는 모든 말들은 그에게 달라붙어 내면화되었고, 자신이 꿈꾸고 계획하는 일은 모두 실패로 돌아갈 거라는 비합리적인 신념까지 얻게 됩니다.
언제부턴가 그는 파국으로 향하는 열차의 선로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가끔씩이라도 열차에서 내려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열차 밖으로 그를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테고요. 하지만 그는 그 사람을 만들 여력마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카프카와 펠리체는 1912년부터 약 5년간 교제를 하면서 두번 약혼하고 두번 파혼한다. 교제 중 5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받은 편지를 모두 없앤 반면, 펠리체는 카프카에게서 받은 편지를 모두 보관하고 있었다.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그나마 다행인 건 죽음을 앞두고 그가 응어리진 감정을 정리하려 한 일입니다. 평화주의자답게 그는 "예상되는 당신의 거침없는 반론을 유추하고 그중 일부는 인정하면서까지 당신과의 관계를 공평하고 평화롭게 마무리 지으려 했습니다."
혹시라도 다음 생에 그를 만나게 된다면 한 가지만은 기억해 주세요.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고 대체할 수 없어 가족 간 갈등은 더욱 깊고 탈출구는 좁다는 사실을요.
문장 천재답게 당신과의 관계를 두 줄로 요약한 그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심문을 마칩니다.
"어쨌든 이 반론 덕분에 제 생각이지만 진실에 상당히 접근할 수 있게 된 것 같고, 그 결과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삶과 죽음이 보다 가벼워질 수 있을 겁니다"-<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부모 자식 간 갈등은 대개 자식가진 죄로 결론나버리곤 한다. 부모 입장에서야 억울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자식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연유에서 자식 몫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