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역의 탈선
장판이 검게 눌어붙은 아랫목 위로 난 작은 문을 열고, 두서너 계단 올라가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평소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그 공간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에 생명을 얻었다. 유년 시절 다락방 이야기다.
어른이 꾸부정히 서야 할 정도로 낮은 천장 아래로 철 지난 옷가지나 고장 난 스탠드, 오래된 책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 눈길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안쪽 구석에 비스듬히 서 있던 가야금이다. 호기심에 몇 번 튕겨보았지만 곧 흥미를 잃었고, 그 후로 가야금은 늘 우리 관심 밖에 있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는 다락방이 있던 집을 떠나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때 많은 것들이 자취를 감췄다. 그중 하나가 할머니의 가야금이다. 할머니 기세가 꺾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 일 것이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다락방 구석에서 긴 잠에 빠져 있던 가야금이 연주되는 걸 본 건 딱 한 번, 내가 대여섯 살 무렵이었다.
두 문화의 충돌
할머니는 전형적인 신여성이었다. 통역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고, 일본어는 물론 짧은 영어까지 구사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았고, 삶을 즐길 줄 아는 분이었다. 구순을 넘기고서도 단정히 차려입고 핸드백을 챙긴 후에야 집을 나섰다. 음식 만드는 걸 즐겼고, 대학생 형과 누나들에게 고고춤을 전수하기도 하셨다.
그에 반해 어머니는 과수원집 8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끝이 없는 농사일에 부모는 지치기 일쑤였고, 자식 챙길 여력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식들은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부모에게 어필했다. 누군가는 성적으로, 또 누군가는 살뜰한 살림 솜씨나 노래 솜씨로.
그런데 어머니 생존방식은 달랐다. 고래 힘줄 같은 고집과 자존심이 그것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변소 앞에 진을 쳤고, 온 식구가 달려들어 빌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달라도 너무 다른 여인들이 가족의 연을 맺었으니 고부간 대립은 불 보듯 뻔했다. 시어머니가 음식 간 보며 미각에 집중할 때, 며느리는 싱크대 문 닫는 소리에 신경을 쓰는 식이었다. 전형적인 손발 안 맞는 커플이었다. 직장이라면 누구 하나 문을 박차고 나갔겠지만, 그곳은 서로가 대체하기 힘든 존재들이 모인 가정이었다.
그렇게 이질적인 두 문화가 만나 섞이는 곳에서 우리는 자랐다. 커서야 깨달은 거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어머니 영향을 더 받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할머니에 대해 많은 부분을 오해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귤을 드시다 너무 시면 얼굴을 찡그리며 뱉어버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참지 못하는 건 미숙한 행동”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말에 따라 우리는 무엇이든 참고 버텨야 한다고 배웠다. 변화무쌍한 감정은 믿을 것이 못되고,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장한 우리는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랐고, 감정을 나누고 표현하기보다는 정신적 교감에 더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관계를 맺으려 하다 보니 어려움이 따랐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서운했고, 억누른 감정이 쌓여갈수록 관계는 더 어려워졌다. 상대에게 내 기준을 기대하다 거기에 못 미치면 실망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인내는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할머니처럼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반드시 필요했다.
할머니의 유산
떠나신 지 10년이 넘은 지금, 할머니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다락방 문을 열고, 수북이 먼지가 쌓인 채 놓여 있는 할머니의 삶을 꺼내어 읽는다.
얼마 전, 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할머니가 도회지에서 손주 밥 해주던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가끔씩 집에 오실 때마다 할머니는 비좁은 자취방과 문만 열면 버티고 서 있는 시멘트벽이 답답하다고 푸념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던 지인은 “젊은 나이에 여자가 단칸방에 갇혀 얼마나 답답했겠느냐”며 할머니를 공감하는 것이 아닌가. 아차 싶었다. 우리에게 그 이야기는 인내심의 중요성에 관한 일화였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할머니의 하소연이 성마른 성격 탓이 아닌, 한창때의 여성이 품을 만한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돈이 생길 때마다 장에 들러 온갖 식재료를 사 와 맛있는 음식을 해주신 것도 미래에 대한 대비가 없는 낭비벽이라기보다는 손주를 기쁘게 하기 위한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도.
대여섯 살 무렵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나는 어느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꿀물과 카스텔라가 놓여 있었고, 고운 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니가 가야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청아한 목소리와 춤사위가 대문 밖으로 너울너울 퍼져나갔다.
새초롬이 앉아 있는 내 눈을 맞추며 가야금을 연주하던 할머니 얼굴에서는 결코 잊히지 않을 시원한 미소가 피어났다. 어쩌면 그 순간 마루 한쪽에 앉아 있던 며느리는 그리 편치 않은 심기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섞이는 기수역은 풍요로운 어장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한쪽 세력이 너무 강해 그 지역을 휩쓸 때 염분의 불균형을 초래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자유로운 삶을 살던 할머니와 심은 대로 거둘 줄밖에 모르던 어머니가 서로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존중했더라면 어땠을까. 서로 다른 생각과 생활습관이 조화를 이루며 좀 더 풍요로운 문화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저 다름을 불편하게 느껴 대립하다 갈등으로 마무리된 관계가 아쉽고 안타깝다.
그렇게 이질적인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 분리와 단절이 일어나는 “기수역의 탈선”이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