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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듀어런스호에게 배우는
협상의 지혜

얼어붙은 관계 탈출 법

by 장동혁

남극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은 대담한 도전에 나선다.

로알드 아문센이 이끄는 탐험대가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발견하자, 그는 남극 대륙을 횡단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탐험선 인듀어런스호는 거대한 부빙(浮氷)에 갇혀 침몰하고 만다.

대원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벌판 위에 고립되었고, 영하 90도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섀클턴은 구명정 한 척으로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해협을 건너는 결단을 내렸다. 구명정 한 척으로 무려 1,500km를 항해한 끝에 도움을 요청하는 데 성공했고, 놀랍게도 대원 28명 전원이 살아 돌아왔다.


이 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거친 폭풍도, 집채만 한 파도도 아닌 ‘부빙’이었다.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 덩어리들이 천천히 배를 조여 오면서, 결국 인듀어런스호는 침몰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문득 우리 일상 속 갈등을 생각했다.

자기 확신이란 이름의 ‘부빙’에 갇혀 서로를 옭아매는 순간들, 그리고 때로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부빙이 되어 상대를 얼어붙게 만드는 순간들.


난파.jpg 부빙 속에 갇힌 인듀어런스 호

관계를 가두는 세 가지 환상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갈등을 경험한다.

친구와의 오해, 직장 동료와의 충돌, 가족 간의 불화. 처음에는 단순한 의견 차이였지만, 어느새 각자의 확신이 부빙처럼 굳어버리고, 그 순간부터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갈등 조정가 다니엘 다나는 사람들이 갈등 속에서 빠지는 세 가지 환상을 이야기했다.


1. 승패의 환상

갈등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고, 누군가는 패배하게 될 싸움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긴다고 해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가 조금씩 양보할 때, 함께 이기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2. 나쁜 사람 환상

내 의견을 반대하는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부정적이지?”

“저 친구는 늘 자기중심적이고 경솔해.”


상대는 단지 다른 의견을 냈을 뿐인데, 우리는 그 사람이 늘 문제였던 것처럼 여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상대의 의도를 왜곡하고, 관계는 점점 얼어붙는다.


3. 도로 장애물 환상

상대방을 더 이상 협력할 대상이 아니라 방해물로 여기는 것이다.


“또 저 친구군… 저 친구야…”


이런 생각이 들면, 우리는 더 이상 나가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잃고 체념해버린다. 그러다 결국 상대방을 함께 해결책을 찾아갈 파트너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보게 된다.


대ㅔ원들.jpg 부빙 위에 남겨진 대원들


부빙을 녹이는 법


섀클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관계 속에서 얼어붙은 부빙을 녹이는 첫걸음은, 이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대방은 나를 무너뜨리려는 적도, 나를 방해하는 나쁜 사람도 아니다. 단지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마음을 조금만 열고 한 발 물러서면, 얼어붙었던 대화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를 장애물이 아니라 해결책을 함께 찾아갈 동료로 바라볼 때, 갈등은 싸움이 아니라 협력의 기회가 된다.


섀클턴 경은 생존을 위해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대원들과 의견을 나누고, 서로의 강점을 활용하며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적이 아니라 협력할 파트너로 바라볼 때, 갈등은 우리를 가로막는 얼음덩어리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안내하는 바람이 될 수 있다.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누군가와 갈등에 빠졌을 때, 협상이 더이 상 진척되지 않을 때, 섀클턴 경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서서히 얼어붙어 관계를 조여 오는 부빙을 바라보자.


내 고집과 확신이 상대와의 관계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면, 먼저 그것을 녹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서로를 적이 아니라 동료로 생각하고 한 걸음 물러설 때, 우리는 예상치 못한 해결책을 발견하게 된다.


혹한의 남극에서 28명이 모두 살아 돌아온 것처럼,

우리도 얼어붙은 갈등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부빙을 녹일 것인가, 그대로 갇혀 있을 것인가.


그 선택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섀클턴.jpg 어니스트 섀클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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