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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고의 축복

성숙한 부모를 만나는 행운

by 장동혁

인생 최고의 축복을 꼽는다면?


조막만 한 얼굴에 훤칠한 키, 천부적 재능, 남부럽지 않은 재력이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가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빈손으로 인생의 출발선에 선 사람이, 몇억씩 하는 집을 갖고 시작하는 사람을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로또에 희망을 건다.


언뜻 좋은 학벌이나 재산, 사회적 지위를 가진 부모가 축복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잘 드러나지 않는 진짜 큰 복은, 성숙한 부모를 만나는 것.

그래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관계의 풍토를 물려받는 것.

그보다 지속가능한 유산이 있을까.


성숙한 부모는 자녀에게 건강한 인간관계의 토양을 남긴다.

관계를 수단으로만 보고 거리낌 없이 타인을 탈취하거나,

불안과 공허함을 못 견뎌, 관계에 매달리느라 수탈당하지 않고,

관계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키워가는 토양.




우리는 관계의 숲을 벗어나 살 수 없다.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해도,

관계를 맺고 유지할 줄 모르면

불모지에 뿌려진 씨앗처럼 언젠가 성장이 멈춰버린다.

그리고 그 관계의 힘은 대부분,

부모와의 최초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심리학자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유아기 애착경험이 평생의 인간관계 양식을 결정짓는다고.

부모의 품에서 신뢰를 배우고 충분히 감정을 나누어본 아이는 다른 사람과도 연결되고, 때로는 자기 자신과도 깊게 연결된다.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불안정한 부모 곁에서 자란 아이는

세상과의 관계에서조차 경계와 불신, 과민함을 품기 쉽다.


우리는 종종 잊는다.

아무리 좋은 작물도

형편없는 토양에서는 시들고, 웃자라게 마련이다.

관계도 그렇다.

어떤 이들은 뛰어난 능력과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주변 사람들과 갈등과 반목으로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한다.

반대로 어떤 이는 작고 보잘것없는 밭에 심겼지만,

따뜻한 햇살과 적당한 바람 속에서

알차고 단단하게 자란다.


이민진의 『파친코』에 나오는 선자의 아버지가 그렇다.

그는 몸이 불편했고, 가진 것도 없었다.

크고 풍성한 밭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고,

그 안에서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며,

딸 선자를 변함없이 비추는 태양처럼 지지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았고,

자신의 한계를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선물처럼 자신에게 와준 딸에게,

존재 자체로 충분히 사랑받는 감각을 물려주었다.

비록 밭은 작았지만,

그 안에서 선자는 알차게 자랐다.


좋은 부모란 모든 걸 갖춘 훌륭한 부모가 아니다.

재산이나 학벌, 사회적 성공이 아닌,

경험 속에서 자신을 직면하며,

변할 줄 아는 사람.

아이를 자신의 분신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떠날 귀한 손님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가르침의 목적이 사회적 성공이 아닌, 성숙과 독립임을 아는 사람.

그런 부모 곁에서 자란 아이는

타인과도 그렇게 연결되는 법을 배운다.




요즘 세대는 복잡하고 무거운 현실 속에 있다.

예전처럼 낳아준 것만으로 감사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왜 나를 낳았느냐”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살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허들이 너무 높고 멀어졌기 때문이다.

집값, 학비, 불안한 노동시장,

그리고 SNS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성공한 사람들’의 삶.


부모의 재력이나 배경은 이제

일종의 ‘공정한 출발선’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진짜 성공한 사람들 곁에는

'자식의 단점이나 허물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 부모'

‘맹목적 신념으로 자식을 통제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부모’,

‘있는 그대로 자녀를 인정해 준 부모’가 있었다.


그런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는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안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사람들과 건강한 거리를 만들 줄 안다.

그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면의 힘이다.




성숙한 부모를 만나는 것.

그건 단지 좋은 환경을 물려받는 일이 아니다.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성장의 방향으로 나가는 풍토를 물려받는 것이다.

외모도, 돈도, 학벌도 변할 수 있지만,

타인을 품을 줄 알고, 자신을 지킬 줄 아는 관계 능력만큼은

끝까지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삶의 자산이 된다.

그리고 그 자산은, 다음 세대가 살아갈 정원의

햇빛이 되고, 바람이 되고, 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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