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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숙한 부모의 그림자

너무 일찍 수확된 사람들

by 장동혁

흙과 물, 그리고 불이 어우러질 때 아름다운 도자기가 탄생한다.


성숙이란 말도 섞다란 뜻의 라틴어 ‘temper’에서 왔다. 내 선물만 보이지 않아 서운한 감정을, 다른 감정이나 감각, 기억과 섞어내며 평정으로 돌아오는 능력. 그것이 성숙이다.


반대로, 불쾌한 장면을 끊임없이 곱씹고 재생하며 헤어 나오지 못해 관계를 뒤흔드는 것, 그것이 미성숙이다. 성숙은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며, 평화란 강압이나 회피 없이 서로를 안전하게 마주하는 관계 상태다.


미성숙한 부모는 이 조율의 힘이 부족하다. 갈등은 곧 분노로 번지고, 서운함은 침묵이나 통제로 드러난다. 싸늘하게 등을 돌린 관계에서 친밀함은 숨을 쉴 수 없다. 특히 부모라는 자리는 자신의 감정 상태가 곧장 자녀에게 전달되는 민감한 자리다. 따라서 자녀와의 관계에서 이 미숙함은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미성숙한 부모는 자녀를 하나의 존재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확장된 자아나 분신으로 여기기 쉽다. 자녀가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은 사랑이 아니라 거절과 배제에 대한 원초적 불안에서 비롯된다. 그 불안을 덮기 위해 부모는 관계를 지배하고, 주도하고, 통제하려 든다. 그러나 통제는 사랑의 방식이 아니라 결핍의 증명이다. 이때 자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부모의 불안을 덜어주는 장치가 된다.


왜 어떤 부모는 그렇게까지 자녀를 조종하려 드는 걸까. 그 밑바탕에는 늘 같은 질문이 흐른다. “나는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즉, 부적절한 자신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불안이다. 이 질문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우리는 누군가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대신 우위에 서거나 그를 장악함으로써 안도감을 얻는다.


이런 통제적인 부모의 전형은 소설 『스토너』에서 잘 나타난다. 주인공 스토너의 아내, 에디스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충분한 애정과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성장한다. 이른 나이에 도망치듯 결혼한 그녀는 남편과의 교감에 실패하자, 자신이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존재인 딸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버지를 따르는 딸을 점점 격리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꾸미고 훈육하려 든다.


그 결과 가족의 정서는 뒤틀리고, 딸은 자아를 온전히 피우기도 전에 임신과 함께 삶의 무게에 짓눌린다. 사랑받지 못한 이의 사랑은 이처럼 파괴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조종한다.


이런 부모는 감정을 읽지 못한다. 자기감정에도, 타인의 감정에도 낯설다. 관계는 어색하거나 지나치게 밀착되기 쉽고, 칭찬은 과하고 침묵은 무겁다. 늘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비난하며, 그 시선으로 자녀를 본다. 도달할 수 없는 이상과 완벽주의에 사로잡혀 자신과 타인을 끊임없이 책망한다. 아이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부모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억누르게 된다.


편협한 신념으로 구축된 자기 세계 안에 타인을 가두는 게 사랑은 아니다. 아이는 나의 연장선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세계다.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선, 나 자신의 세계가 먼저 단단해야 한다.


성숙한 부모는 거울이 된다. 자기를 비워낸 투명한 거울 안에 아이의 감정을 비추고, 존재를 환영해 준다. 그러나 미성숙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한다.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의 사랑은 때로 자녀의 정원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결핍에서 비롯된 상처는 그렇게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그래서 고리를 끊는 일이 필요하다. 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


가마 안에서는 진흙과 물, 그리고 뜨거운 불이 오랜 시간 섞이며 연단의 시간을 보낸다. 우리에게도 아프게 나를 직면하고 다시 빚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내가 나를 다루게 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도 조금쯤은 품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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