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까워 보지 못ㅎ는 밀착관계의 비극
시인 류시화는 외눈박이 물고기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한쪽 눈밖에 없는 이 물고기는, 평생을 둘이 붙어 다닌다.
한 마리는 오른쪽, 다른 한 마리는 왼쪽.
두 마리가 함께 나란히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아갈 수 있다.
이 비목어(匕目魚)의 사랑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절박하다.
함께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에, 이들은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결핍에서 비롯된 이 사랑은, 온전함을 꿈꾸는 순수하고도 치열한 결합이다.
그러나 그 절박한 사랑이 어그러질 때, 한쪽이 사라지거나 부재할 때, 남겨진 한 마리는 그 결핍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를 그 자리에 끌어들인다.
그 대상이 자녀일 때, 비극은 시작된다.
평화가 깨질 때, 고통은 아래로 흐른다
부부 사이의 균열은 단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한 불안은 가족 전체에 번지고, 피해는 가장 낮은 곳으로 스며든다.
외롭고 상처 입은 부모는 자녀를 ‘위로자’, ‘조력자’, ‘정서적 파트너’로 삼아 감정의 공백을 메우려 한다.
이때 자녀는 더 이상 아이로 존재할 수 없다. 부모의 결핍을 보듬기 위한 정서적 도구로 소모되기 시작한다. 사랑이란 이름 아래, 평화라는 명분 아래, 자녀는 부모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고, 고통을 대리 감당하는 동반자가 된다.
등나무처럼 엉킨 사랑
소설 『백 년의 고독』에서 우르술라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한다. 그 결과, 가족 전체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기 되어 버린다.
부모의 불안은 가지손이 되어 자녀에게 뻗고, 그 줄기는 모조 사랑인 ‘밀착’과 ‘집착’의 형태로 서로를 휘감는다. 그리고 애증이라는 진액으로 엉겨 붙는다.
이처럼 등나무처럼 뒤엉킨 관계 속에서 자녀는 자신만의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자기 삶을 향해 자라야 할 줄기는 말라비틀어진다.
“It’s not your fault” ― 거짓 자아의 해체
어릴 적부터 부모의 불화를 목격하며 자란 자녀는 본능적으로 ‘평화’를 소망한다. 자꾸 부모를 돌보려 하고,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잠깐의 웃음이나 대화 같은 조각난 평화라도 얻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 평화는 진짜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죄책감과 도덕적 강박이 만들어낸 감정적 환각제에 가깝다.
자녀는 결국 ‘거짓 자아’(False Self)를 만들게 된다. 부모의 감정을 살피고서야 안도하는, 부모 상태에 자신을 조율하며 연기하는 존재.
그렇게 ‘상호의존적 자아’가 자리 잡는다. 자신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감지하고 자신의 욕망과 감정은 봉인한 채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 『굿 윌 헌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천부적 재능을 지닌 윌은 어린 시절의 학대와 방임으로 인해 스스로를 ‘문제아’로 규정한다.
그의 마음을 열어준 건, 상담가 숀의 반복된 한마디였다.
“It’s not your fault.”
“네 탓이 아니야.”
처음엔 무심히 넘겼던 이 말은 점차 반향을 일으켰고, 윌은 마침내 억눌렀던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이란 감정마저 편하게 대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애도이자, 거짓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자녀의 삶이 사라질 때
부모와 밀착된 자녀는 결국 두 가지 길 앞에 놓인다.
첫째는, 살기 위해 부모를 떠나는 길.
이 길은 고통스럽긴 하지만 자율성을 회복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둘째는, 만성 불안으로 가는 길.
“나에겐 너밖에 없어”,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칠 수 없는 외눈박이 물고기의 절규에 묶여 자신의 삶을 평생 봉인해 버리는 길이다.
이 경우 자녀는 성인이 되고도 자신의 감정과 선택을 죄책감으로 막는다. 그리고 행복은 부모의 안녕과 맞바꿔야 하는 타협의 대상이 된다.
이런 사랑은 너무 가까워 오히려 서로를 보지 못하는 왜곡된 사랑, 어긋난 동맹이다.⸻
관계의 정원은 평화에서 시작된다
관계는 정원과 같다.
물이 흐르고 햇살이 들며,
서로 다른 개성들이 저마다 자라야 아름답다.
그 첫 조건은 신선한 공기와도 같은 ‘평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평화로운 부부 관계는 자녀에게
안정이라는 기후, 충만함이라는 토양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교육의 첫 단추는 ‘가르침’이 아니라 ‘가족의 평화’다. 이 평화는 관계의 정원에 반드시 제공돼야 할 정서적 풍토이자, 자녀가 마음을 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다.
결국, 관계의 본질은 서로를 얽매거나 대신하지 않는 데 있다. 각자 자리에서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거리를 지켜주는 것.
나란히 걷는 평화 속에서 비로소 진짜 사랑이 자란다. 그 위에서야 정원은 피어나고, 자녀도, 부모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