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등의 숨은 기능

인정이 인정(認定)을, 그리고 인정(人情)까지 낳는다.

by 장동혁

그날도 나는 강릉행 버스 2번 좌석에 앉아 있었다.

앞이 시원하게 트여 좋아하는 자리다.

하나, 얼마 안 가서 나는 자릿세를 톡톡이 치러야만 했다.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달리던 중, 1차선에서 차량 한 대가 튀어나왔다.

놀란 기사는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승객들은 일제히 앞으로 쏠렸다.


나는 앞차가 미안하다는 뜻으로 비상등을 켜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차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빠져나갔다.


분통이 터진 기사는 욕설을 쏟아냈고,

감정은 곧 행동으로 번졌다.


곧이어 혼신의 레이스가 펼쳐졌다.

버스는 그 차가 끼어들지 못하게 속도를 조절했고,

급기야 두 차량은 아찔할 정도로 붙었다.


결국 승용차는 긴 경적을 울리며 밀려났고,

보는 나는 내내 오금이 저렸다.


마음은 시원했지만, 승객으로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깜빡이 세 번.

‘미’ ‘안’ ‘해’

아니, 두 번도 좋다. ‘미’ ‘안’


그 작은 신호만 있었어도

위험한 감정의 폭주는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비상등 점멸,

그저 위험 경고 신호로만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사려 깊은 운전자는 안다.

매뉴얼에는 없는 손짓 하나가 상대방 마음을 순식간에 녹일 수 있다는 사실을.


비상등은 단순한 기계장치가 아니다.


“내가 당신을 불편하게 했군요. 미안해요.”


들리지는 않지만, 짧고도 확실한 인정의 표시다.


그 작지만 세련된 손짓이 침묵할 때, 억울함의 불씨는 금세 분노로 옮겨 붙는다.


그리고 오늘도,

이런 '무심함'과 '분노'가 충돌하며 사회는 끓어오른다.

마치 분자들이 충돌하며 물의 온도를 높이듯.


그런 의미에서 비상등은

감정의 비등을 막아주는 도로 위의 냉각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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