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옆으로 갈게요

개방성의 힘

by 장동혁

"제가 옆으로 갈게요"

드라마 대사가 아니다. 얼마전, 처음 만나는 여성이 내게 한 말이다.


인터뷰이와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약속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해 자리를 살폈다.

2층이 적당해 보였지만, 아쉽게도 6인용 테이블뿐이다.

테이블이 너무 컸고, 가운데 길게 구멍까지 나 있어 아쉬움이 더했다.


‘낭패다. 조금만 더 일찍 올걸...’


주위가 소란스러운 데다가 거리까지 멀어, 인터뷰가 제대로 될지가 의문이다.


시간이 되자 인터뷰이가 도착했다.

이름 때문에 남성일 거라 생각했는데, 젊은 여성분이다.


첫 틀이 깨졌다.

당황했지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뭐 드실래요?”

음료를 주문하고 카운터 앞에 서있는데, 그녀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뭔가 흐름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네…’


어색해진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커피 나오면 제가 가지고 갈게요. 먼저 올라가 계세요.”

부드러웠지만,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녀를 밀어낸 셈이다.


잠시 뒤, 커피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앉고 보니, 역시나 거리가 너무 멀다.

그렇게 난감해하는 사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 멀지 않아요? 제가 옆으로 갈게요.”


그녀는 한 치 망설임 없이 자리를 옮겼다.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두 번째 틀 마저 깨졌다.

내가 계산하고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문제를 단박에 해결해 버린 것이다.


잠시 말을 잃었다.

숨결이 그녀에게 가 닿을 것만 같았다.


내 머릿속 회로가 과열되는 동안, 그녀는 흐름을 탔고, 그녀의 행동 하나는 공간뿐만 아니라 공기까지 바꿔 놓았다.




폐쇄성은 조용하고 단정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망설임과 초조함으로 요동치고, 균열이 인다.

반면에 개방성은 겉으로는 유연해 보인다. 하지만 단단하게 버티는 힘이 있다.


폐쇄성이 익숙한 길을 고집하는 내비게이션이라면,

개방성은 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여행길이다.

그 길은 계획이나 통제가 아닌 흐름이 만든다.

사람들의 잦은 발걸음에 길이 나듯,

서로의 반응에 따라 관계는 부드럽게 열린다.


개방성이 대초원이라면, 폐쇄성은 울타리가 둘러쳐진 귀족의 사냥터나 실내 낚시터를 닮았다.

폐쇄성은 예측 가능한 세계 안에서는 잘 작동하지만

예상 밖 상황에선 쉽게 당황하고 멈춘다.


틀 안에서 나는 꽤 유능했다.

하지만 세상은 틀 밖에 있었다.


결국 내 틀이 깨졌고,

틀 밖에서 우리는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오늘도 당신은 무언가를 예측하고 준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관계는 계획이 아니라 반응이고,

구조가 아니라 흐름이다.


내가 만든 틀은 나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가두고, 뜻밖의 운명 앞에서 얼어붙게도 만든다.


이제부터 조금씩, 틀을 지워보자.

그렇게 울타리가 보이지 않는 초원으로 나가보자.


상상 밖의 미래와 과거의 기억이 집요하게 속삭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숙함이 낫지 않겠냐고.

그러나 하다 보면, 모험이 주는 놀라움과 경이로움도 점차 익숙해질 것이다.


성격이란 것도 결국 반복되는 ‘행동의 선택’이 아니던가.


그녀가 보여준 신선한 충격 하나가, 나의 하루를 유쾌하게 바꿔놓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랑은 어째서 결핍을 향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