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끼'의 무게

마음의 무게와 관계의 균형

by 장동혁
찬바람이 나오!


《춘향전》어느 대목에선가 등장하는 대사다.


어사 몽룡이 남원으로 내려가다, 춘향의 편지를 들고 한양으로 향하던 아이와 마주친다. 편지를 받아서 읽던 몽룡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지자, 편지가 찢어질세라 얼른 달라고 하며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다 몽룡의 허리춤에서 동으로 된 접시 같은 물건을 보고 아이가 놀라며 한 말이, “찬바람이 나오.”다. 뭔지 몰라도 번쩍이는 마패에서 서슬 퍼런 공권력이 느껴진 것이다. 작은 물건 하나가 상황과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세상 모든 것에 질량이 있듯, 우리가 쏟아내는 말에도 무게와 질감이 있다. 같은 말도 맥락과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오래전, 교회에서 만난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선생님이 나처럼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고,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뒤, 쉬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궁금한 것도 있고 해서, 언제 한 번 보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답을 보냈다.


그래요, 언제 밥이나 한 끼 해요~!


습관처럼 던진 인사였고, 별 다른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요지는,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밥이나 한 끼’가 문제였다.


그때, 전에 경험하지 못한 마음의 무게가 느껴졌다.




관계를 맺으며 우리는 많은 것들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오가는 것의 균형이다. 그 균형이 깨지면 관계도 위험해진다.


나는 그분을 여러 교사 중 한 명으로 여겨 이물 없이 대했다. 만날 때마다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 외에는 특별히 주고받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건 내 생각이었다.


그분 안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관심, 기대, 바람, 그리고 조심스러운 호기심. 하지만 그 무게를 전혀 알 수 없던 나는 그분의 제안을 가벼운 말 한마디로 퉁 쳐버린 것이다.


우리 안에는 저울이 하나 있다. 그 저울 위로는 내가 준 것과 받은 것들이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올라간다. 말 한마디, 태도 하나, 눈빛 한 줄. 심지어 집에 돌아와 그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까지도.


그분이 나를 향해 보인, 혹은 쌓아온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무게에 비해 내가 보낸 “밥 한 끼”는 너무도 가벼웠다.


그렇게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에 말에, 관계 저울이 균형을 잃고 기울어져버린 것이다. 이전의 편한 관계로 돌아가는 데에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관계 저울의 균형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며 소리 없이 다가온다. 시간이나 돈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은 쉽게 기록되지만, 관심이나 기대, 애정, 감정 같은 것들은 눈에 띄지 않기에 놓치기 쉽다. 그렇게 놓친 만큼, 상대의 마음을 잃기도 한다.




그날 이후, 나는 말의 무게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상대 마음과 관계의 맥락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농담이나 가벼운 말투 대신, 오해를 줄이는 안전한 말로 시작하게 되었다.


때로는 유머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싶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맥락과 관계의 결을 살핀 후에야 건넨다. 일종의 안전 운전이다.


내가 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어사의 마패처럼 찬바람이 될 수도 있다. 혹은 상대가 조용히 쌓아온 마음의 무게가 그에 맞지 않은 가벼운 말 한마디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말과 마음에도 무게가 있다면, 나는 오늘, 어떤 무게의 말들을 건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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