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입사한 박 사원은 책임감이 강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었다. 동료들 사이에선 “믿을 맨”으로 통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부터 말수가 부쩍 줄었다. 회식 자리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팀장이 그를 호프집으로 불렀다.
“무슨 일 있어? 요즘 좀 안 좋아 보여.”
고개를 숙인 채 망설이던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마음이 좀 불편해서요…”
며칠 전 일이었다. 해외영업팀에서 출장 기념으로 초콜릿을 사왔고, 박 사원이 하나씩 돌리기로 했다. 모든 자리에 정성껏 놓고 돌아온 그에게 초콜릿 한 박스가 남았다. ‘어떻게 하지’ 하다, 퇴근길에 조용히 챙겨 나왔다. 그때부터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진실해야 하고, 남을 배려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친구가 잠들기 전까진 절대 먼저 자지 않았어요. 혹시 할 말이 남았을까 봐요.”
말을 들은 팀장은 잔을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박 사원이 맥주 세 잔 마신 것처럼만 살았으면 좋겠어. 너무 경직되지도, 너무 풀어지지도 않게.”
그 한마디는 박 사원에게 위로이자 충격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만든 ‘룰’에 질식되고 있었다.
정직함, 배려, 성실함. 그 모두는 분명 소중한 가치다. 그러나 그가 품은 진심은 어느 순간 ‘절대 기준’이 되어 스스로를 검열하고, 주변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기 시작했다.
관계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나 태도는 많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지배하거나 관계 위에 군림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관계의 ‘참여자’가 아닌, ‘오브젝트’가 된다. 게임을 즐기던 유저가 규칙에 몰두하다 결국 플레이어가 아닌 룰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진심은 중요하다. 성실하게 관계를 대하려는 태도는 또한 귀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하나의 ‘절대적 가치’가 될 때, 관계는 더 이상 살아 숨 쉬지 않는다. 그 순간 관계는 ‘열린 게임’이 아니라 ‘닫힌 게임’이 되고 만다.
닫힌 게임은 정해진 규칙과 결과 안에서만 움직인다. 신념을 지켰다고 생각되면 환호하고, 어기면 낙담한다. 경우의 수는 좁고, 융통성은 없다. 그곳에서는 룰이 게임을 주관하고 통제하게 된다.
조선 시대 예송논쟁이 그 대표적 예다. 죽은 자의 예우 문제를 두고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충심’이 옳다고 믿으며 사생결단을 벌였다.
결국 남은 것은 쓸모없는 결론과 불필요한 피바람뿐이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걸 모르면 친구가 아니지”, “그 정도도 못 맞추면 같이 못 가” “신앙이 달라 함께 갈 수 없어요” 이런 말 뒤에는 ‘룰’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룰이 너무 특별해져, 관계를 지배할 때 갈등은 시작된다.
하지만 열린 게임은 다르다. 어릴 적 돌멩이 몇 개만 있어도 우리는 충분히 즐거웠다. 놀이 도중에 “이거 말고 이렇게 하자!”며 즉석에서 룰을 바꾸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게임이 계속 흥미롭게 이어지는 것이었지, 게임의 요소가 참여자를 지배하는 게 아니었다.
열린 게임은 관계를 ‘시’로 만든다. 정해진 정답도 없고, 고정된 구조도 없다. 상대와 나, 그 사이의 상황과 감정에 따라 룰은 유동적이며 창의적으로 재해석된다. 실수는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낼 하나의 재료가 된다.
열린 게임을 하는 사람은 모든 경험을 자신을 만들어가는 재료로 삼는다. 실수도, 갈등도, 침묵도, 다 관계라는 게임을 흥미롭게 지속시키는 변수로 이해한다.
반면 닫힌 게임을 하는 사람은 실수 앞에 자신을 정죄하고, 타인을 심판하며, 그 규칙 안에 갇혀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지금 내가 지키려는 건 룰인가, 사람인가?”
“뭔가를 너무 특별하게 바라보는 건 아닌가?”
관계는 누가 더 잘 지켰는지를 따지는 시험이 아니다. 함께 호흡하며 조율해가는 예술이다.
장발장을 끝까지 쫓았던 자베르는 ‘법’이라는 룰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정의란 곧 체포였다. 반면, 장발장을 용서한 주교는 그 룰을 다르게 해석했다.
“이건 신의 몫이고, 당신은 내 손님이오.”
그 한마디는 장발장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룰을 위한 관계가 아니라, 관계를 위한 룰이 되어야 한다. 룰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해석될 수 있고, 무엇보다 함께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날 박 사원이 초콜릿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제가 고생했으니까 덤으로 하나 더 가져가겠습니다! 다들 괜찮으시죠?”
장난처럼, 가볍게.
아마도 대부분 웃고 넘겼을 것이다.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가 우려한 신뢰의 균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결국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 속 법정일 뿐이었다.
관계가 힘들어지고, 무겁게 느껴질 때 한 걸음 물러나 이렇게 자문해보자.
“혹시 내가 관계를 너무 특별하게 여겨 몰두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기억하자. 관계라는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승패나 룰이 아니라, 그 게임이 흥미롭게 지속되는 것, 그리고 그 게임 안의 ‘사람’, 무엇보다 ‘나’ 자신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