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통하지 않고, 아무리 설명해도 대화는 제자리다. 제 귀로만 듣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속 깊은 대화는 꿈도 못 꾼다. 그저 피상적인 대화뿐.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돌아오는 건 남 탓뿐. 관계는 자라지 않고, 서서히 굳어간다.
가까워지기 전,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자칫, 나까지 닫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어쩌면 그는 성경에서 독보적인 ‘악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의외의 악인, 한 달란트 받은 종
성경은 한편으로 ‘악인 종합선물세트’라도 되듯, 온갖 어두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죄 없는 형제를 돌로 쳐 죽인 자, 부인 죽인 걸 자랑스러워해 노래로까지 만든 자…
그들의 악행은 어렵지 않게 납득이 된다. 하지만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악인만큼은 다르다.
그는 누구를 해친 것도, 조르바처럼 재산을 탕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몹시 진지했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고심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를 이상하리만큼 책망한다.
“이 악하고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만들라.”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밖에서 문고리를 붙들고 이를 갈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도대체 무엇이 주인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든 걸까?
종의 착각: 닫힌 게임
긴 여행을 떠나는 주인에게 한 달란트를 받은 그는 철저히 ‘닫힌 게임’ 세계를 살았다. 그에게 세상은 이미 짜인 판이었고, 룰은 변할 리 없었다. 자기보다 더 받은 동료들을 보며, '가진 자가 더 갖게 되고, 실수하면 벌로 이어지는 냉혹한 세상...'이라며 강퍅해져 갔다.
“꿈쩍도 않는 게 최선이지! 뭐.” 그리고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땅속 깊이 묻어 둔다. 어쩌면 주제도 모른 채 주인을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못 알아봐도 유분수지...’ ‘에라이! 뭐 하러 고생해’
하지만 그가 저지른 진짜 실수는 따로 있었다. ‘잘못된 신념’이었다. 그는 주인을 착취를 일삼는 간악한 사람으로 단정했고, 확신했다.
“당신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굳은 사람이라 알았기에…”
편견과 두려움에서 비롯된 그의 생각은 잘못된 판단이었음에도, 그는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그 믿음을 고수했다. 움직이지 않고, 듣지 않았으며, 스스로 의심해보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 확신이라는 게임 요소에 진지하게 몰두한 나머지, 게임 주체가 아닌 게임의 오브제가 되어버린 닫힌 게임의 전형이다.
주인의 비전: 열린 게임
그러나 주인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생들 했구나,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겠다!
"수익률이 참 좋구나! 잘했다"가 아니다.
이 말은 결과보다는 태도와 변화 가능성을 중시하는 신뢰의 언어다. 그는 실패하더라도 도전하고, 결과가 게임의 끝이 아닌, 게임이 지속되게 하는 요소로 삼는 열린 게임의 운영자였던 것이다.
다른 종들은 주인의 기대에 부응해 움직였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만은, 유독 맹신의 껍질에 갇힌 채 변화 가능성을 닫아버렸다. 그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인은 그런 그의 특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았다. 그를 더 큰 책임의 자리에 둘 수 없음을 깨닫고, 그를 정원 밖으로 내쫓았다. 종으로도 쓰기 힘든 인물이었던 것이다.
‘닫힌 사람’과의 관계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진짜 문제는 게으름이 아니라 ‘믿음의 폐쇄성’이었다.
‘내가 본 주인은 이렇고, 다르게 볼 여지는 없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자신의 해석에 끼워 맞췄고, 자기와 다른 관점은 왜곡하거나 부정했다. 자기 오류를 인정하는 게 변화와 성장의 시작이지만, 이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평생을 그 믿음 아래서 이어온 삶을 부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주위 사람들까지 닫히게 만든다. 소통의 바람이 불지 않으니 관계는 굳어가고, 피로만 쌓이며, 결국 내 정서와 판단마저 흔들리게 된다.
어쩌면, 지옥이란 것도 스스로 만든 믿음의 감옥에 갇힌 채, 끝없이 원망하며 사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분별하는 눈
살다 보면 이런 사람들을 만난다.
• 자기 해석을 절대시 하는 사람
• 상대의 말을 왜곡해서 듣는 사람
• 문제 원인을 늘 외부에서 찾는 사람
• 변화와 조율을 거부하는 사람
이러한 닫힌 플레이어와의 관계는 분노와 답답함, 단절의 연속이다. 대화는 정체되고, 오해는 깊어지며, 관계는 뿌리내리지 못한 채 말라간다.
심지어 그들은 혼자 무너지지는 법이 없다. 함께 있는 사람까지 굳어지게 만든다. 그러니 우리는, 관계 맺기 전에 분별하는 눈이 필요하다. 정원에 어떤 나무를 심을지 결정하는 일처럼, 함께 자랄 수 있는 사람인지 먼저 살펴야 한다.
믿음은 질문할 수 있을 때 살아나고, 관계는 변화 가능성 위에서만 자란다. 열린 게임의 자세이며, 이천 년 전, 예수가 대표적인 게임 체인저였다.
가끔, 삶과 인간관계가 고착되어 굳어 갈 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생각이, 절대적인가?”
“혹시 나도 모르게, 닫힌 게임 안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지금 곁에 있는 이 사람은, 함께 자라 갈 수 있는 사람인가?”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관계는 다시 열린다. 그리고 그곳에서야말로, 진짜 복음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