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yes24.com/goods/detail/179599369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누군가의 자녀가 되고, 자라나며 친구와 동료로 살아간다. 그런 면에서 관계는 우리에게 선택이 아닌 숙명이다. 관계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을 넘어, 삶의 방향과 의미 그리고 인생의 격까지 좌우한다. 삶에 대한 관심과 재미 또한 이 관계라는 토양 위에서 피어난다.
하지만 관계는 때로 우리를 버겁게 한다. 관계의 의미가 깊을수록, 상대를 대체하기 어려울수록 통증은 커지고 상처는 깊어진다. 소중한 존재와의 갈등이 주는 괴로움에 대해 일본의 한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가족이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몰래 내 다 버리고 싶은 존재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고, 가까웠던 마음이 서서히 거리 두기로 이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을까. 이 책은 좋았던 그때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상대를 다루는 요령’이 아니라 ‘함께 평화를 유지하는 법이’다.
그 길로 접어들기 위해 기억해야 할 다섯 개의 ‘ㄱ’이 있다.
첫째, 관계(Relationship): 관리된 평화를 향하여
말과 행동이 쌓여 만들어지는 관계는 조화와 평화, 그리고 불화(갈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은 피상적인 조화도, 파괴적인 불화도 아닌 ‘관리된 평화’다. 평화란 단지 갈등이 없는 관계가 아니다. 강압이나 희생 없이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태다. 이때 우리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것을 나누게 되고, 건강한 자아의 성장이 일어난다.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이해하고 관리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소중한 결실이다.
둘째, 감정(Emotion): 안과 밖을 살피는 감수성
감정은 우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인이다. 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할 때 평화는 쉽게 깨진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상대의 감정을 헤아릴 줄 아는 감수성은 관계의 성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자산이며, 성숙한 사람의 주요 특징이다. 그런 이가 곁에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셋째, 거리(Distance): 밀착의 비극을 막는 완충지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지나친 밀착은 비극을 낳는다. 너무 가까워지다 보면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에만 매몰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거리다. 관계가 숨을 쉬기 위해서는 감정의 완충지대, 즉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넷째, 갈등(Conflict): 변화의 신호
갈등이라는 먹구름은 관계 실패의 증거가 아니다. 그보다는 거리 조절이 어긋났거나 감정이 앞서고 있다는 알림이다. 이를 방치하면 갈등은 힘을 키워 관계를 잠식하지만, 제대로 다룬다면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관계가 한 층 더 깊어진다.
마지막으로 게임(Game): 여유로 이끄는 시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게임 뷰(Game View)다. 관계를 무거운 다큐멘터리로 보기보다, 한 발 떨어져 여러 요소가 맞물려 돌아가는 게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진지함의 늪에 빠져 “이게 사과할 일인가?”를 묻기보다, “아, 지금이 사과할 타이밍이구나”라고 판단해 가볍게 움직일 때 여유가 생긴다. 이는 관계를 가벼이 여기는 태도가 아니다. 아집과 감정이라는 ‘프론트맨’의 손에서 벗어나, 관계를 주체적으로 이끄는 플레이어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이 책은 당신의 말이 날 선 감정이 되어 관계를 무너뜨리거나,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엉겨 붙어 삶을 혼란하게 만들지 않도록 돕는 안내서다.
이제부터 관계라는 게임에서 ‘평화’라는 값진 보상을 얻기 위한 여정을 시작해 보자.
작년 연말, 원고 정리를 위해 일본 효고현 산골에 자리한 다나카상의 집을 찾았다. 1월 1일이 일본 최대 명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일정을 변경하려 했지만, 노부부는 "염려 말고 오라"며 이방인을 반겼다. 자녀들의 방문을 이틀이나 미루고 나를 위해 고타츠(난방 테이블)까지 내어준 그들의 환대는 조용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문제는 한국에서부터 달고 간 감기였다. 난방이 여의치 않은 시골집 다다미방에서 나의 기침 소리는 밤새 울렸고, 노부부는 나를 위해 20분 거리의 눈길을 달려 약국에 다녀와야 했다. “숟가락만 하나만 더 얹으면 된다”는 나의 말에도, 후미코상은 끼니마다 정성 가득한 요리를 올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편한 내색 없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나를 품어주었다.
교토로 떠나는 날 아침, 후미코 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토 유마(あっという間)네요.”
‘앗 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는 그 말에는, 내가 머문 시간이 그녀에게도 소중했고 짧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가 내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장상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안심이 돼요.”
뜻밖의 말이었다. 내가 아는 나는 까칠하고 예민하며, 때로는 가족에게조차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사실 우리 가족에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후미코 상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우리에게 장상은 참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에요.”
그때 다시금 깨달았다. 그들이 느끼는 내 인상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장을 보러 갈 때 장바구니를 대신 들고, 마트에서 카트를 밀며 그녀 뒤를 따르고, 식사 후 말없이 식기를 옮기던 작은 행동들이 오랜 시간 겹겹이 쌓여 '안심이 되는 사람'이라는 얼굴을 만들었다는 것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결국 어떤 말을 남겼고, 어떤 행동을 반복했는지로 드러난다. 관계를 끝까지 쪼개고 나면, 남는 것은 말과 행동뿐이다.
교토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는 한국에 있는 가족을 떠올렸다. 그들에게도 나는 안심이 되는 사람일까, 아니면 피로와 짜증을 남기는 사람일까. 내가 떠난 뒤 후미코 상은 이틀이나 앓아누웠고 다나카 상은 통화 내내 코를 훌쩍였다. 관계란 이렇게 무겁고, 또 이토록 따뜻하다.
내가 끼친 불편함마저 "아토 유마"라는 아쉬움으로 표현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다시금 '안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관계의 정원은 거창한 이론이나 단호한 손짓으로 가꿔지지 않는다. 장바구니를 들어주는 손길과 안부를 묻는 한마디, 말없이 부족함을 채워주는 태도 같은 흔적들이 모여, 누군가 편히 머물 수 있는 숲을 이룬다.
이 책을 덮는 당신의 곁에도, ‘아토 유마’라고 말해줄 관계의 정원이 깃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