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해진 공터. 한 무리 아이들이 오징어 게임이 한창이다. 게임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무렵 동네어귀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00아~ 밥 먹어".
그 소리에 반응하듯 아이들은 불빛 깜빡이는 집을 향해 쪼르르 달려간다.
이제는 소설에나 등장할법한 풍경이다. 자극이랄 게 별로 없던 시절 우리는 그렇게 부모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이 풍경은 관계가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애착관관계는 그렇게 바라보게 만들고, 귀 기울이게 만들며 의존하게 만든다.
실제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맺고 끊는 거래관계와 달리 애착관계는 본능에 의해 맺어진다. 좋은 예가 부모-자녀 관계다. 엄마소와 송아지가 몸을 맞대고 서 있거나 어미 오리 뒤로 새끼 오리들이 무리 지어 헤엄치는 걸 떠올려 보면 된다. 송아지는 제대로 성숙한 뒤 독립할 때까지 어미 곁을 떠나지 않는다. 모든 동물이 그렇다.
애착관계는 새끼가 안전하데 자라 독립하는 데 필수적이다. 새끼들은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른 시기에 부모를 잃는다는 건 깊은 산속에서 나침반 없이 길을 잃은 것과 같다. 공포 그 자체이며 생존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새끼들은 애착관계라는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부모가 손을 놓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절대 손을 놓지 않는다.
사회생활에서도 이 애착관계가 작동한다. 처음 직장이나 모임에 갔을 때를 생각해 보라. 나 스스로 거기에 적응해 나간 것 같지만 누군가와 애착관계를 맺으며 조직의 일원이 된다. 그를 통해 조직을 이해하고 소속감을 키운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그렇다면 애착관계의 힘은 어떻게 커지는 걸까.
먼저 가장 감각을 통해서다. 그 사람을 자주 보고 그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에게 익숙해진다. 출근해서 그가 눈에 띄면 반갑고 마음이 놓인다. 미지의 숲 속에서 작은 등불을 만난 것처럼 느껴진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서도 연락을 한다. 그에게 이야기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겁다. 그러면서 실낱같은 연결선이 생긴다.
친해지더 보니 동질감이 생긴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음악도 찾아 듣는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옷, 추천하는 메뉴, 취미에 관심을 갖는다. 사춘기 또래 한 명이 깻잎 머리를 하면 주위 모두 따라 하는 것과 같다. 이를 통해 결속력이 생긴다.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다. 프로 스포츠 팬덤을 보면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동작을 하며 하나임을 느낀다. 이쯤 되면 끈이 좀 더 선명해진다.
그렇게 실과 바늘처럼 다니며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한다. 상대가 기쁘면 나도 기쁘다. 그리고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 진다.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묘한 마음이 든다. 서운하다. 내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도 모르게 소유권이 생겼고, 그 걸 주장하고 싶어지는 거다. 괜히 속 좁은 사람 되기 싫어 웃으며 나왔지만 마음이 휑한 느낌이다.
여기까지는 실패해도 상처를 크게 받지 않는 방법이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상대가 거부할 경우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자신을 좀 더 개방해야 하고, 욕구가 좌절되더라도 인내하고 감수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자아가 확장되고 성숙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게 두려워 시도하지 않고 감각 등 기본적인 방법에 의존한다면 성숙이 멈출 수도 있다. 데이트를 하다 보면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감각과 동질성.
시간이 지나 관계가 깊어질수록 상대의 의미도 커진다.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기 힘든 중요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상대도 과연 나를 그렇게 여기는지 확인하고 싶어 진다. 그 사람 웃는 걸 보는 게 낙이고 그 사람이 불쾌해할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그 사람을 통해 기쁨, 슬픔, 서운함, 분노, 질투, 사랑 등 다양한 느낌을 경험한다. 이제 줄이 꽤 굵어진 거다.
마지막으로 속내 드러내기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도 없고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뭔가를 그 사람에게는 털어놓고 싶다. 왠지 후련해지고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주말에 내가 뭘 할 계획인지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지난주 동료와 싸웠던 일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의견을 듣고 싶어 진다. 아니 지지받고 싶은 거다. 혹여라도 그에 관해 내가 모르는 중요한 일을 다른 사람이 안다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내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이 다섯 가닥 끈이 엮여 굵은 동아줄이 된다. 이것이 애착관계(Attachment)다. 이 끈 안에는 얼마나 강한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겠는가. 쉽게 끊을 수 없고 갈수록 서로를 기대게 만든다. 그런데 이 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 함께 한 모든 것들이 의미가 되고 베이스캠프가 되어주기도 한다. 응축된 에너지를 이용해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쿨하게 넘어갈 것도 쉽게 넘어가지지 않는다. 더 따지게 된다. 감정이 격해지고 그 후유증도 오래간다. 그럴 때 함께 묶여있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알 것이다.
애착관계는 조직이나 사회를 구성하는 힘의 원천이다. 과거 부모들도 그 힘을 이용해 아이들을 양육했다. 글 한자 모르고 열 자식을 키울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 유용성보다는 위험성에 주목한다. 그러다 보면 갈수록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사회 맥락의 변화가 그 끈이 생기도록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