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꽃을 선물로 받다
안녕하세요.
혼자 취미로 끄적이던 글을 브런치에 한 번 올려보기로 했어요.
제목은 데이지이고요, 어른들을 위한 동화입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꾸준히 올려볼 예정이에요.
그럼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곳곳에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어나야 할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다. 청명한 종소리에 나는 눈을 떠졌지만 바로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 가만이 누워있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일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상상해 보았지만 왠지 일상이 깨지는 건 두렵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곧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는 모두가 이 시간에 일어나야 했고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이 곳은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마을이 분주해진다.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지던 종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어른이던 아이던 모두 몸을 일으켜 외출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일자리로, 아이들은 학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른들은 각자 정해진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하나씩 처리하고, 아이들은 한 살씩 나이를 먹을 때마다 어른으로서 알아야 하는 지식을 쌓는다. 하루치의 일과를 다 마치고 저녁이 되면 마을 곳곳에서 시끌벅적한 모임이 벌어진다. 화려한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도 있고, 기분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술집에서 삼삼오오 친구들과 모여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가족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 사람도 있고, 테이블 가운데 촛불이 놓인 근사한 라운지에서 데이트를 즐기는사람도 있다. 모든 인간관계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곳에선 그 누구도 혼자 있지 않는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몸을 맡긴다. 다음날 해가 뜨면 다시 종소리에 맞춰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어른들은 일자리로, 아이들은 학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이런 날의 반복 또 반복이다.
나는 기억도 나기 전부터 이런 생활을 반복해왔다. 우리 모두는 바쁘고 치열하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이 마을의 모습은 내가 아는 사람 살아가는 모습의 전부다. 그렇게 이런 생활에 몸을 맡긴 채 나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오늘 하루를 또 열심히 살아간다.
사람들이 일년 내내 숨쉴 틈 없이 바쁘게 살아가기만 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휴식을 취하는데 일요일은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는 휴일이다. 아이들도 이날은 학교에서 벗어나 유일하게 뛰어 놀수 있도록 허락된 날이다. 나는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마을 중심에 위치한 광장으로 뛰어갔다. 보통은 아이들끼리 장난 치고 뛰어 놀며 하루를 보내지만 이번 일요일은 특별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 재치 있는 언변으로 아이들을 홀리는 이야기꾼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아이들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그를 향해 광장 한 구석으로 달려갔다.
“오늘은 색깔이 많은 마을에 대해 이야기해 주겠다!”
이야기꾼은 대게 여행가이기 나름이다.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은 항상 루틴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 힘들다. 오직 마을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새로운 이야기만이 아이들의 주의를 끌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우와! 우와!”
아이들이 함성을 질렀다.항상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그에 대한 기대감이 아이들을 흥분시켰다.
이야기꾼은 이 마을에 있는 색깔은 세상에 존재하는 색의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꽃 한 송이를 꺼냈다. 처음 보는 꽃이었다.
“이 꽃이 무슨 색이지?”
이야기꾼이 물었다.
“흰색인 것 같은데요.”
한 아이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맞아. 흰색이야. 하지만 이 마을의 흰색과는 다른 흰색이지.”
이 말을 마치고 여행가는 아이들에게 꽃을 더 자세히 보여주었다. 나도 까치발을 들어 꽃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애썼다. 꽃은 이야기꾼의 말대로 정확히 흰색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흰색보다 훨씬 더 환한 흰색이었다. 나는 이렇게 환한 흰색은 난생 처음 보았다. 다른 아이들도 나와마찬가지인지 곧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저렇게 환한 흰색이 존재하다니. 신기하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 말고 또 다른 색도 존재하나요?”
내가 물었다.
“우리가 아는 색보다 우리가 모르는 색이 더 많단다.”
이야기꾼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색이 또 있을 수 있죠?”
“안타깝게도 내가 준비한 색은 이 꽃이 지닌 색밖에 없구나. 어디 보자. 어떻게 하면 잘 설명해줄 수 있을까. 굳이 말로 설명하자면, 이 마을의 호수는 한 가지의 파란색으로만 이루어져있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일곱 가지 파란색으로 빛나는 호수가 있단다. 또 봄이 오면 이 마을에는 한 가지 연두색의 싹만 트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새싹이 수십 가지의 연두색으로 반짝반짝 빛을 내며 얼굴을 드러낸단다.”
아이들은 감탄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모두가 이야기꾼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우리가 모르는 색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동경과 감탄이 자리잡은 채.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항상 빨리 끝난다. 이야기가 짧아서가 아니라 짧게 느껴져서다. 그에게는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는 능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잠시 아쉬워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광장곳곳으로 흩어져 각자의 자리로 모습을 감추었다.
일요일이 끝났다. 아쉬움을뒤로 한 채, 월요일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다들 언제 휴일을 즐겼냐는 듯 다시 일터로, 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보다 일요일을 더 좋아한다. 아마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에 사람들이 각자 주어진 일을 하는 데에는 다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할 나이가 될 즈음부터 나는 이미 이 마을의 사람들이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본분에 맞는 일을 하지만 각 사람이 맡은 일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정해져 있었다. 높은 계급의 일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돈을 지불하거나 또는 명예나 권력이나 인기를 안겨주었다. 낮은 계급으로 갈수록 이것들을 얻는 일이 줄어들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은 일을 통해 보이지 않는 등급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점차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등급을 가진 사람들하고만 어울린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 또한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신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모두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아직 신분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잘 이끈다던가 두뇌가 뛰어나다던가 하는 모습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높은 계급의 일자리를 얻을 것 같은 아이들을 대략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정해진 것은 없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저울질 속에서 모두 함께 지낸다.
나는 사람을 보이지 않는 등급으로 나누는 것이 모두를 피곤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등급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기왕 등급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되도록이면 높은 등급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높은 등급에 속한 어른이 되기 위해 현재 할 수 있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요일이 다가오길 기다리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
이야기꾼이 다시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한 달이라는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은 어김없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나 또한 이번에는 이야기꾼이 어떤 여행담을 준비해왔을지 기대하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오늘은 공평한 나라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
이야기꾼은 등급이 없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여느 때와 같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의 말에 심취해있었다. 나 또한 등급이 없는 나라가 있다는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광장을 떠나는 이야기꾼의 뒤를 뒤쫓아갔다.
“등급이 없는 나라가 정말 있나요?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겠죠?”
나는 의심 섞인 눈초리로 물었다.
이야기꾼은 자신을 쫓아온 한 소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나의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이고는 대답했다.
“등급이 없는 곳도 있단다.”
나는 신분을 나누는 것이 모두를 피곤하게 만든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럼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나요?”
“모두 나름의 일을 하지.”
“그럼 일자리에 계급이 없는 건가요?”
“네가 말하는 계급이 재산, 명예, 권력, 인기를 얻는 척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일자리에 계급은 존재한단다. 모두가자로 잰 듯 똑같이 얻어갈 수는 없지. 하지만 등급이 없는 나라에서는 일의 계급이 한 사람의 등급으로 이어지지 않는단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등급이 없을 수는 없어요. 그것은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이에요. 다들 등급이 내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아가잖아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배웠어요. 그리고 그게 내가 본 세상이에요.”
이야기꾼은 잠시 고개를 들어 마을을 한 번 천천히 둘러보고난 뒤 물었다.
“몇 살이지?”
“열여섯이에요.”
“아직 등급이 없겠구나. 마침 너에게 알맞은 선물이 있단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한 달 전에 색깔이 많은 나라에서가져온 환한 흰색의 꽃을 꺼냈다. 꽃은 잘 말려져 있었다. 말려진꽃은 또 다른 흰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그 꽃을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꽃의 이름은 데이지란다. 너처럼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를 생각나게 하는 꽃이지. 데이지는 평화를 뜻한단다. 이 마을처럼 경쟁이 심한 곳엔 어울리지않는 꽃이지.”
그리고 그는 얼른 덧붙였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는 법이란다. 등급이 없을 수도 있다는 내 말을 진정 이해하고싶다면 너도 여행을 떠나보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의 갑작스런 제안에 놀랐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여행이라고요? 제가 여행을 어떻게……”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니?”
“저는 열여섯이에요.”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단다.”
“여행은 제게 너무 위험해요. 학교도, 가족도, 친구도 여기 있고. 여행을 떠나는 모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제가 얻는건 불분명하고요. 그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에요.”
“과연 그럴까? 얻는 건 불분명하지만 분명한 건 얻을 수 있는 게 확실히 있다는 거란다.”
그는 말을 이었다.
“여행은 그치지 않는 비와 같단다. 비가 아무리 많이 내려도 작은 그릇에는 조금밖에 담지 못하지. 그릇이 클수록 더 많은 비를 담을 수 있을 테고. 중요한 건 네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을 담을 수 있다는 거야.”
나는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책상 위에는 공부를 하기 위한 책이 펼쳐져 있었지만 나의 눈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꾼에게서 받은 꽃을 한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리며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확실히 이 꽃을 보기 전까지 이런 색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했다. 갑자기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좁게 느껴졌다. 나는 여행을 떠나본 적은 없지만 여행을 떠나는 게 아마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가게 되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등급이란 게 없다면 학교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 짐을 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