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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eong Jul 20. 2021

노력은 저항일까

[서평] 노력의 기쁨과 슬픔



노력과 재능, 어떤 것을 먼저 고려하는가. 노력은 우리의 삶에 어떤 모습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가볍게 읽을 책이 아니다. 당신은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은 당신에게 사고 흐름을 극단적으로 바꿀 매개가 되거나, 혹은 책장 바깥으로 던져질 책이다. 색조가 약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들로만 구성되었을 줄 알았던 이 책은 정말 진한 명조를 띈다.




<본문>


Chapter1. 계속하기 / 앞을 향한 시선이 우리를 지탱하는 줄이다.


알랭은 노력하기를 멈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일러줄 뿐이다.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모든 것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 다음 행보가 어떻든 지금 자신의 위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미래를 위한 결단들은 전부 가상의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되 조금씩 나아지기만 하면 된다.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갈아엎을 필요가 없다. 하고 있는 일을 하되, 조금씩만 방향을 바꾸는 자세가 있다면 새로운 행동을 시작하는데 큰 힘이 들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의 위치'는 나만이 알고 있다. 여타 수많은 도서에서 말하듯, 자신에게 눈을 돌려야만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이 흘러가는 세월에 있듯, 수립한 계획에 있든 타인의 눈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이것만큼은 의식적으로 피해야 한다. 줄타기 중의 관중은 나를 즐겁게 할 수도, 집중을 방해할 수도 있지만 땅에 떨어지든 줄타기에 성공하든 그 결과는 내가 감당할 부분이다. 스스로의 기준에서 조금씩 나아지기만 하면 된다.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면 글의 내용이 아니라 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많이 써볼수록 잘 쓸 수 있다. 이미 썼던 것을 다시 보지 말고, 계속 써 내려가라. "여기서 깨달은 바가 있다." 알랭은 말한다. "잘 쓰는 기술의 비법은 고쳐 쓰지 않고 계속 써 내려가는 것이다. 써놓은 문장 하나가 백지보다 낫다. 문장이 조악하고 고르지 못하더라도 거기서 무언가 배울 것이다. " 이미 썼던 글을 고치기보다는 계속 써 내려가는 편이 낫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떠다니는 모든 생각들을 붙잡아 땅에 심는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심어놓은 생각이 잘 자라도록 할 수 있을까. 자라난 생각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무튼,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고민을 낳는다.

글쓰기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매일 일기를 썼던 적이 있다. 다시 읽기는 두려운 글들이 많았지만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가짐을 다잡는데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쓰다 보니, 남에게 읽히는 나의 글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글쓰기 기술을 내 글에 적용시키려 했다. 그러나 '보이는 글'에 신경을 쓰다 보니 예전만큼 일기가 더 이상 일기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글의 구성과 스토리 이것저것을 고치고 정제하다 보니, 정작 내가 써야 하는 것을 잃어버렸다. 회의감을 느꼈고, 글쓰기를 포기했다. 나는 나에게 솔직해지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글에는 진심을 담았지만, '표현방식'은 의식적인 배움의 영역임을 깨달았다.

'다시 읽기' 가 두려웠다. 이 습관을 버리기가 참 어렵다. 나의 글 전체를 다시 읽을 용기가 없어 문장, 문단 단위에서 글을 고친다. 저자가 이야기 한대로 '문장이 조악하고 고르지 못하더라고 죽 글을 이어나가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계속 써 내려간다는 것이 어떤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쓰는 행위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을 믿고, 글을 남기려고 한다. '일기'처럼 나에게 돌아오는 글이 아니라, 나에게서 시작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



Chapter2. 시작하기 / 우리는 망설이기 때문에 길을 잃는다.

행동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대하며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알거나 알지 못했던 지식에 의존하여 끊임없이 사소한 결정을 쌓아가는 일이다. 행동한다는 건 절대 멈추지 않고 더 잘하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는 뜻이다....무언가 확고하게 결정했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그 결정을 고집하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자신의 결정을 재평가하면서 새롭게 발생하는 사건의 파도와 물살에 따라 방향을 수정하는 편이 나을까?


글 전체에서 관통하는 메시지는 '느긋함'이다.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것과 흐름을 같이한다. 저자는 위 같은 물음에 '방향을 바꾸는 자세'라는 답을 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나는 오히려 확고하게 결정하는 자세가 부족하다. 한 방향으로 몰아붙여 집중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사건의 파도와 물살에 따라 방향을 수정하다 보니 고민만 많아지고, 시작하는데 오랜 숙고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좋게 보아 유연함이지, 팔랑귀와 다를 바가 없다. 책을 읽으며 이런 생활양식이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위로를 받았지만, 지금의 나는 한 방향에 집중하고 싶다. 사실 이런 태도도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기는 하지만.



Chapter3. 1만 시간의 유혹 / 원하면 이룰 수 있다가 아니라 이룰 수 있다면 제대로 원한 것이다.

추정과 일반화를 기반으로 한 이 연구가 바로 '1만 시간의 법칙'으로 이어졌다 법칙에 따르면 1만 시간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참으로 고무적이고 민주적이며 비차별적인 결론 아닌가. 원하면 이룰지니.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곳이 어디든 닿을 수 있다는 메시지다. 하지만 스포츠의 영역에서든 음악의 영역에서든 이러한 결론은 아이들 대상의 조기교육을 부추길 수 있고, 어떤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개인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탓이라는 편견을 강화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해방하는 동시에, 책망하기도 하는 메시지다. 글래드웰이 말하는 '위대함을 만드는 마법의 숫자'가 자칫 우리를 옭아매는 데 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점진적 과부하'는 현재의 자기계발의 트렌드이다. 발전을 위해 자신을 갈고닦는 노력을 우리는 자기계발이라고 여긴다. '1만 시간의 법칙'은 일정 분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전문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와 같은 태도를 부정한다. '자연스러움'이라는 생활양식에서 벗어난 능력주의는 오히려 개인의 잠재력을 가둔다는 의견이다. 뾰족한 송곳은 오히려 무디어지기 쉽다는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 뾰족함은 의도치 않게 다른 부작용을 초래한다. 능력주의를 부추기고, 실패의 원인을 자신으로만 돌릴 수밖에 없는 유연하지 못한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환경과 상황에 실패의 원인을 돌리는 것도 필요하다. 인간은 강하지 못한 존재이다. 날아오는 돌들에 몸과 마음이 부서져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스스로를 그렇게 잠식해 경직되게 만든다. 경직된 마음은 다시 풀어지는데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악순환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저항운동을 지속해야만 성취와 원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따라서 능력주의에 대해 긍정하는 부분도 있다. 다만, 편견과 착각에 매몰되지 않으려 또 다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받아들였다.

정량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저항을 많이 받고 있는지 파악할 수단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



Chapter4. 성공의 순간 / 신은 노력하지 않는다.

내려놓기는 현대인이 받는 스트레스에 대한 기적의 치료법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보통은 내려놓자는 생각에 집착할수록 더 놓을 수 없게 된다....데카르트의 두 번째 격률이다. 훌륭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오래 생각할 필요도, 아니면 아예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것. 그냥 받아들인 다음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 이 경우에는 아주 즉각적인 결정이었다. 행위의 순간에 일어난 결정이랄까. 의심은 심은 들어설 수 없었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지단이 결정을 내린 것인지, 결정이 지단을 선택할 것인지조차  명확히 알 수 없다. 이 즉각성, 순간성이 바로 성공적인 결정을 위한 조건 중 하나다.

축구선수 지단은 기억하는가. 저자는 지단의 은퇴경기에 대해 묘사했다. 성공의 순간에 대해 표현했다. 'Zon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무아지경'이라는 익숙한 단어로 이해할 수 있는 'Zone'은 떠도는 모든 생각과 고민이 지워지고 오로지 순간에만 집중하는 찰나를 의미한다. 목표를 이루어내는 순간, 특히 역동적인 활동을 하는 시합, 경기의 경우 집중이 극에 달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여러 예시를 들어 이 순간을 묘사했다. 나도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어떤 것에 몰입하여 최고의 결과를 얻어낸 기억 말이다. 순간에 내리는 결정은 그간의 수많은 노력에서 비롯되고, 자신도 모르게 체화된 무언가가 최고의 선택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고 한다. 이러한 순간은 자의적으로 만들 수 없다. '자연스럽게', 의도치 않은 순간에서 꽃을 피운다.



Chapter6. 버티기의 기술 / 우리를 말하고 춤추게 하는 건 의무감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다.

'가장'이 성공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외국어를 말하고 싶다면 먼저 내가 그 언어를 말하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자......'버텨야 한다'라는 생각은 '깊은 곳에 평안이 있고, 사랑이 있다'라는 생각을 절대 이길 수 없다. 다른 목적이 없는 그 자체의 사랑이란 감정이라기보다는 상태다. 강렬한 열정이 아니라 차분한 행복에 가깝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진정한 평화의 형태로, 긴장을 풀고 나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잡념을 떨칠 수 있게 해준다. 개별 존재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경험을 선사하므로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잊게 만든다.

욕망을 이루려면, 그 욕망을 의식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인정받기 위한 욕구가 크다. 나의 능력과 역량이 좋은 평가를 받고, 영향력이 있었으면 한다. 이러한 욕망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분명 욕망이지만, 그에 대한 행동은 뒤로 잠깐 숨겨놓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지속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우리가 계속 인식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과 환경' 그 자체이고 정말로 원한다면 그곳에 내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들어가 있을 것이다. 버틴다는 것은 정말 이런 것이다. 버틴다고 느낄수록 더 큰 저항이 밀려올 것이고 우리는 휩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파도를 버틸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칭찬해 주어야 할 것이다.



Chapter7. 생각 멈추기 / 과도한 생각은 존재 전체를 오염시키고 심지어 위협한다.

생각이 많아지면 우리는 회한, 후회, 분개의 감정에 갇힌다. 그러니 문제가 일어난 원인을 찾거나 이유를 분석하려는 시도를 아예 차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즉 생각을 멈추고 더 이상 사고의 전개를 막기 위해서는, 아예 오래도록 생각해서 그 생각에 질려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마치 야생마에 올라타기 전에 말을 지치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이해하고 싶다'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자. '의미의 환각'이라는 장에서 무스탕은 이렇게 서술한다. "그 증상은 삶의 흐름을 방해하고 개인을 속박하며 서로를 떼어놓는 식으로 이미 우리를 고립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증상에 집중하면, 증상이 강화될 위험을 키우는 꼴이다. "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계속 파고들다가 그것에 더 깊숙이 갇히거나 똑같은 자리만 끝없이 맴돌 것이 아니라, 문제를 원래 있던 그 자리, 다른 모든 것의 한가운데 그대로 두어야 한다. 문제를 가변적인 총체에 속한 한 부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해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문제를 움직이지 않는 고정적이고 석화된 집중의 대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잊어버린 채로 계속 보존하는 방법, 이것을 우리는 습관이라고 부른다. 습관이 되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생각'은 감정과 떼어버릴 수 없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도 분명 감정은 존재한다. 그 자체가 '생각'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도한'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다. 넘쳐흐르는 생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현재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것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사소한 행동을 함으로써 잡념을 떨칠 수 있다. 이 같은 방법 말고도 잡념을 떨치는 방법은 그 생각에 오히려 매몰되어 소모시키는 것이라고도 한다. 지칠 정도로 말이다. 나는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는 것 같다. 신기하게도 하나의 걱정에 집중하다 보면 그것이 '무의미'함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상황에 따라 유용한 방법을 사용하려면 그 방법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해한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한때, 남을 이해하고 싶다는 오만에 빠져 그 사람의 행동을 나의 잣대에 대입하여 해석하려는 습관이 있었다. 이는 분명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이해한다는 것은 타인의 생각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말대로 문제의 가변적인 총체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남을 이성적으로 판단함은 부자연스러운 피드백으로 돌아올 뿐이다.



Chapter9. 집중의 비법 / 너무 열심히 보려고 하면 오히려 보지 못한다.

통념과는 달리 집중은 절대로 지속되지 않는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닐뿐더러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오직 리듬에만 복종하여 높아졌다가 낮아질 뿐이다. 집중이란, 우리가 반드시 타는 법을 익혀야 하는 파도다...."기술을 내면화하는 데는 당연히 노력이 따르지만, 가장 똑똑한 방법을 선택해 필요 이상으로 힘든 부분은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사실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그 동작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지치게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키울 수 있다.

집중하는 방법에도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한 점 돌파를 할 때 집중을 유지하는 것을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인간의 집중 지속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시작에는 '돌입'하지만 단 몇 분 만에 그런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고하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며 너무 낙담하지 않다도 된다. 힘이 빠지면 힘이 빠진 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흐름만 잃지 않으면 그뿐이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면, 한 손으로 만 잡자. 집중의 한계를 인정하되, 다른 손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익히도록 해야 한다.






<서평 에필로그>


저자는 정리하며 이런 말을 한다. "비행기에 올라 가볍게 읽는 책이기를 바라며 썼다" 사실, 나는 저자가 독자에게 원하는 태도를 갖지 못했다. 가볍게 읽으라는 책마저도 치열하게 읽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 개인의 생활양식을 책 한 권으로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꼈다. 힘을 빼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싶지만 동시에, 나는 무언가에 간절함을 느낀다. 그리고 조바심이 생긴다. 책 읽는 삶, 누군가에게는 '지나친 여유'라는 말로 치부될 수 있는 현재의 삶의 양식이 밖으로 어떻게 보일지가 두렵다. 모순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앎을 원한다. 사소할 수 있는 책의 말 한마디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노력하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내비치는 삶을 권장하지만 그것 또한 또 다른 '노력'임을 느낀다. 결국, 저자는 이런 아이러니한 내 모습도 자연스러운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내게 맞는 옷은 내가 커짐에 따라 새로 들여야 할 것이다. 현재에 저항할 여력이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나처럼 해석 여하에 따라,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혼나는 기분이 들 수 있는 책이다. 아무리 느긋해지려 노력해도 그럴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순간 내가 여유로울 수 있는 때를 찾아내거나, 억지로라도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실질적인 삶은 책 바깥에 있다. 책 한 권을 읽는다고 해서, 삶이 송두리째 바뀌거나 태도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의 정신은 조금씩 젖는다.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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