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리뷰
“나는 멈춰 선다. 소크라테스식 위대한 멈춤은 아니지만 (작은 멈춤에 더 가깝다) 어쨌든 하나의 시작이다. 멈춤이 질문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사상가 열네 명이 제시한, 삶을 고양시키는 시를 흡수하며 몇 년을 보냈는데 왜 그들에게 기댈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궁금해진다. 내가 이 작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철학이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나오는 말>
리뷰 >
많이 읽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좋은 책이다.
그들도 인간이었다. 여타 인간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다른 삶을 ‘살았다’. 육신이 이미 죽어 없어졌다. 실존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는 자리와 시간에서 아직도 살아,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이 느낌은 무얼까.
타인을 온전히 알 도리는 없다. 그러나 깊게 사유한 자가 남겨둔 말과 글은 그들을 알 수 있도록 한다. 그들은 자신을 알아주길 바랬고, 기록을 남겼다. 화자의 의도완 달리, 듣는 자는 그들을 ‘아는’데 언제나 실패한다.
나는 너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해’ 할 순 있다. 앎이란 매운맛에서, 궁극적 가치를 떼어낸 이해라는 순한 맛. 만약 앎이 최상의 가치라면 이에 근접하게 하는 건 과거의 기록이다. 우리는 비록 타인을 아는 단계에 미치지 못하고, ‘이해’ 단계에 그치지만 말이다.
타인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바뀌었다. 조건이 있다. 내지르는 자는 자신의 말에 솔직해야 하며, 듣는 자는 때론 꼬아볼 수 있을 정도로 경청해야 한다.
사유하는 자를 이해하게 하는 책이다.
위안이 되었던 두 가지
저명한 철학자도 언제나 자기모순에 빠졌다.
사유하는 자도 언제나 윤리적으로 살지 못했다.
깨달음 두 가지
아포리즘에 대한 오해를 덜었다. 짧은 글, 격언에 고개를 끄덕이던 자신을 보았다.
역시 나는 니체가 좋다. 춤을 추게 한다. 정신의 춤. 댄스 말고.
자문자답 >
Q. 자신만의 진리가 있는가?
세상 모두가 동의하는 진리는 없다. 개인 차원의 진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인식의 틀 안에서 살아갈 뿐인 존재,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라 한정한다면, 틀 안의 인간은 진리를 평생 좇겠지만 결국 좌절하고 말 것이다. 오직 믿는 것만 믿을 뿐인 존재는 한정된 세계에서 이 말을, 그리고 저 말을 진리라 여기며 살아간다. 그렇지 않다면 진즉 붕괴되고 파쇄되어 문명이란 가치를 형성하지 못한 채, 저 먼 행성과 비슷하게 한낱 모래로 진즉 날아다니고 있겠지. 개인의 진리는 곧 개인의 믿음. 믿음의 영역은 곧 인간이 가진 틀. 진리는 없다고도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