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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eong Jan 21. 2022

불안을 다루는 버릇

얼굴에 상처가 많은 이유

불안을 다루는 방법은 사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버릇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버릇을 어느 순간 깨닫는다고 해도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완전히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육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영역 밖의 행위, 즉 버릇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별 수 없다. 버릇이 또 다른 불안의 원인이 되어 스스로를 괴롭게 한다. 그리고 끓어 넘친 불안은 육체에 신호를 주어 그제야 육신은 물리적 격리를 이루고자 한다. 이 굴레는 영원하다.


얼굴에 상처가 나면 손으로 헤집는 버릇이 있다. 내 얼굴엔 언제나 하나, 둘 아물지 못한 상처가 있다. 하나가 나으면 다른 곳에 하나가 생겨나는 식으로. 얼굴 상처를 심려하던 인연들은 손을 잘라야 상처가 없어지지 않겠느냐며 면박을 주곤 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 껍질을 하나씩 벗겨나간다는 것은 말이다, 지금은 더 이상 나의 일부가 아닌 것은 마땅히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과 비슷한 것이라고.


타인은 불안한 내면을 어떻게 다루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를 질러내거나, 타지로 훌쩍 떠난다든지 하는 행동이 있을 것 같다. 나도 이와 같은 일상으로부터의 ‘격리’에서 불안이 해소된다 믿었다. 일단 나와 관계된 누군가가 없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 방식은 일시적이고, 가끔씩에 불과하기에 매 순간 내 핏줄에 흐르는 불안은 배출되지 못해 나를 병들게 한다. 물리적인 병, 그러니까 내 몸에 아픔을 동반하는 원인이 콕 집어 불안이라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불안이 흐르고 있음을 차분히 알아챈 정신은 면역세포처럼 그것을 죽이려 조용히, 그리고 아주 부단히 움직인다. 이때 나의 육체는 정신이 비상 상태에 놓여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정신이 물리적인 실체, 즉 손끝에 우연히 빙의될 때, 내 얼굴에는 하나, 두 개의 새로운 상처가 생기는 것이다. 그 상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갈색의 딱지로 굳게 되고, 이물로 취급된 각질은 불안을 억지로 잡아둘 작은 그릇이 된다. 그리고 내 손톱이 비로소 딱지를 걷어낼 때 작은 불안은 떨어져 나간다. 그 자리에 피가 나더라도 말이다. 비록 나에게서 벗어난 것이 아주 작은 부정일지라도, 그 자리에 다른 아픔이 덧씌워진다 해도, 이 버릇은 정신의 무게를 덜어내는데 효과가 있다. 


내 몸은 세상의 혼란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다. 아마 정신이 끊겨 이 세상에 내가 없어질 때까지 불안은 나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하나, 두 개의 아물지 못한 얼굴 상처를 지닌 채 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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