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정 May 03. 2019

16 여행하지 않은 J의 여행기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바젤 여행기 추천사

한겨울에 '바젤'에 가자고 했다. '스위스'나 '독일'이라고 했다면, 더 쉽게 포기했을 텐데, '바젤'은 어디인지도 몰랐다. 독일과 스위스 그 어디쯤의 직항도 없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서 관심이 사라졌다. 쉽게 포기했지만, K와 E도 조금의 관심을 보이다 그만 둘 줄 알았다. 유럽의 겨울은 춥고, 휴가를 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으니까. 내 예상은 틀렸다. 그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조금씩 그들만의 바젤 여행을 준비해 나갔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받았다.


"바젤이 어디예요?"

혹은

"왜 바젤에 가요?"


K와 E의 바젤 여행에 대한 사전 준비는 출장 준비를 방불케 했다. 그 작은 도시에 그렇게 많은 볼거리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모든 걸 보리라고 계획하는 둘도 놀라웠다. 둘의 성실한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계획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의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디자인, 건축에 대한 학구열을 불태울게 뻔했다.


그들이 "왜 바젤에 가요?"라는 질문에 바젤이 어떤 도시인지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가는 학구파 여행자라면, 나는 "이러려면 여기 왜 왔어?"라는 비난을 들으며 침대에 누워버리는 한량형 여행자다. 가기 전부터 불타 오른 K와 E의 바젤에 대한 열정을 단 일주일간의 여행에만 쏟는 건 너무 아까웠다. 나는 당장 출장 계획서 같은 여행 계획을 바탕 삼아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바젤 여행기'를 퍼블리에 투고하거나, 브런치에 연재하거나, 어쨌든 어떤 형태로라든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행 가서 맨날 침대에나 누워있는 여행자의 이런 조언을 사실 진지하게 듣기란 어려운 일인데, 성실한 K와 E는 나의 주장을 흘려듣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바젤 여행기를 쓰기 위해 브런치에 가입하여, 매거진을 만들어 바젤 여행기를 끝까지 써 내려갔다. 성실한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일이란 정말 놀랍다.


물론 둘은 계속 'J가 쓰라고 해서 썼다', '독촉을 견딜 수 없었다'라고 불평하지만 나는 업로드되지 않는 날, '오늘은 안 올라오나요?' 같은 카톡 메시지 하나를 보냈을 뿐이다. 때로는 그냥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이모티콘 하나만을 보내기도 했다. 이 성실한 사람들은 그런 메시지 하나에도 마음을 졸이며 이 글들을 완성했다.


그래서 나도 바젤에 갈 걸 그랬냐고? 아니. 추운 겨울에 굳이 먼 바젤에 가지 않아도, 훌륭한 글들로 바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내가 왜. 함께 여행을 갔다면 난 K와 E처럼 아름답다는 이유로 불편한 호스텔에 머무는 대신, 평범하고 무난해서 디자이너와 건축가 모두를 실망시키는 체인 호텔에 묵자고 주장했을 거다. 창밖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창가 자리에 앉기 위해 비행기에서 앞뒤로 앉는 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하며 굳이 셋이 한 열에 앉아 맥주를 마셨을 거다. 이 바젤 여행기는 '아름다움'이라는 신념 아래 한없이 성실한 건축가와 디자이너만이 써내려 갈 수 있었던 여행기다. 그 이야기가 벌써 끝나서 아쉽다. 덕분에 바젤에 다녀오지 않고도 함께 아름다움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다.  


J.


+

@around_june_ 



커버 이미지는 K와 E가 우리집에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추천한 Vitra의 L’Oiseau ㅣ Ronan & Erwan Bouroullec, 2011 (https://www.vitra.com/en-us/living/product/details/loiseau)

매거진의 이전글 15 마침내, 에필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