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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Sep 30. 2024

나를 되돌아본 시간들

심각한 질병과 심각한 회의로부터 돌아온 자는 반드시 새로 태어난다(니체)


오랫동안 나는 결핍과 무력감을 맛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일을 겪어도, 지나간 고통을 떠올려도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글은 갑작스레 회복된 활력에 대한 환호성이며, 내일과 모레와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자, 머잖아 시작될 위대한 모험을 알리는 축포가 될 것이다. 다시금 목표가 허락되었다. 나는 이 목표가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다.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프리드니체/포레스트북스>


글을 쉬면서 나름대로의 목표달성을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들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가난과 가난에 젖은 마음가짐과 태도를 극복하고 싶었고, 엄마에 대한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매듭짓고 싶었다. 끊임없이 갈구하며 요란하게 흔들어대는 집착형 인간관계의 끝을 알고 싶기도 했고, 타인이 아닌 내가 스스로를 공격하는 이유와 괴롭고 초조하며 답답함을 느끼는 사유들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  마음이 이토록 불편하고 움츠려드는 건지. 기존의 생각을 파괴할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과거와 같은 얕은 생각의 힘으로는 알아내기 어렵겠다 결론을 내렸던 나는 불이 나면 보통의 사람들과는 반대로 불길로 뛰어드는 소방관처럼 이제는 불편함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끊임없이 책을 읽으며 사색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타인을 보며 헤매고 끌려다니는 비자발적인 행동들은 여전했다. 현재를 살라는 말의 의미를 실천하지 못하는 내 미래가 매번 두려워졌고 나를 살리던 심리서적들이 감흥 없이 단조로워지기 시작했다. 삶을 대변했던 책을 대하는 마음들이 거만해짐을 느끼며 아는 용어와 문장들, 엇비슷한 내용들을 책밖에서 마주하다 보면 단단해졌다 느꼈던 무게감은 오만이고 착각임을 깨달았다. 여전히 스치는 말 한마디에도 서글퍼졌고 그러는 동안 상대에 대한 기대치는 낮출 재간 없이 높아져만 갔다. 내면에서 들끓는 질투와 미움 원망이 불쑥 찾아오는 일들이 잦아지면서 나를 진심으로 아까주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심리서적의 주인공처럼 모든 걸 이해하는 마음과 눈앞에 마주한 불편한 마음을 그만 녹여버리기에는 내 영혼은 아직도 너무나 연약했다. 습관처럼 스스로를 되짚어 흔들어 보다 보니 문득 머릿속의 한마디가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책이 아닌 현실을 경험할 때가 왔다고.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매일 가던 산책도 사색도 횟수를 줄였다. 섬세하고 가녀렸던 감정적인 생각의 시선들을 돌리기 위해 몸을 쓰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긴 시간 동안 내면에만 치우쳐 몰두하고 있었던 사실을 담담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싹을 잘라낼 만큼 완벽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한글을 깨치듯 세상밖으로 나가 작은 것부터 실천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만이 가진 단단한 세계관에 실금이라도 내는 시도를 했다. 늘 해왔던 방식이 아닌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과 행동을 해보았다. 오로지 걸림 없는 내면의 소리만을 실천했다. 나만이 아닌 나를 만나는 수십 명의 타인들. 그들이 되어보고자 했다. 수십 명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순간 내 삶이 전과는 달리 새로워짐이 느껴졌다. 다양함과 광범위함 특별함과 평범함 미숙함과 어리석음 관용과 이기심 무지와 현명함. 그렇게 여러 환경들이 내 눈과 마음속에 들어와 이해심의 크기를 넓혀주었다. 그렇게 나는 오로지 나. 스스로에게만 너무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을 너무 의식하고 있었고 눈치를 많이 보고 행동하며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과도한 친절로 나를 깎아내리기도 했고, 성공한 사람들을 질투하며 신세한탄을 했다. 사람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자책을 많이 하며 스스로를 괴롭혔고, 내가 아닌 타인을 중심으로 살았으며 내 마음이 아닌 평균을 유지하기 위해 나를 희생시키는 걸 당연시하며 타인을 우선시했다. 작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고 밤잠을 설칠 만큼 괴로워했고 뭐든 어린 시절과 연관시켜 엄마 탓으로 돌리며 엄마를 미워했다. 그러다 보니 주어진 환경을 원망하는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나에겐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중심 자연스러움이 필요했다.




나를 돌아보며 스스로를 알아가는 귀중한 시간들을 보냈다. 스쳐갔던 주변인들의 좋은 점은 닮고자 노력했고 좋아 보이지 않은 것은 하지 않으려 했다. 누구를 만나든 적정선을 유지하며 친절했고, 먼저 나서지 않았으며, 날을 세우거나 초라하게 굴지 않았다. 그 덕인지 '댄스스포츠, 민화, 아크릴화, 캘리그래피, 전시회, 독서모임과 같은 배움을 꾸준히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생겼고, 도서관, 문화공연, 단기프로그램들의 활동과 아이들 학교 급식봉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인연이 되는 일은 늘 감사하게 맡아 실천하며 지냈다. 의도한 대로 활동영역이 넓어지자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고, 덕분에 사람에 대한 이해력도 함께 높아져 갔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이들을 보며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데 도움을 얻는 경우도 많았고, 부자들이 평범한 이들 보다 돈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며 돈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 내디딘 두 발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뿐만이 아닌 타인들에게 피해가 가는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으려 노력을 하는 것이 일상인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심플한 사고방식으로 각자의 개성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었고 그럴 때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친밀함을 빌미로 상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던 가족과 지인들이 떠올라 서글퍼지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만 이루어진 정이라는 진득함을 부각해 다른 방식으로 타인을 옭아매며 인간관계에 대한 그릇된 관념과 죄의식을 키운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면서 마음에 걸림 없는 지금의 관계들이 훨씬 더 건강한 관계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주변을 돌아보니 항상 내 곁에 머물러 나를 불편하게 했던 무례한 이들이 한순간 사라져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는 나를 배려해 주고 경계선을 지켜주는 든든한 이들로 메워져 있었다.'필요할 때만 전화하던 사람들. 하소연과 푸념만 늘어놓던 사람들. 술과 친분으로 세상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타인이 자신에게 한 태도만을 문제 삼는 사람들.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우려 사람들을 만나는 이들. 질투를 숨긴 채 상대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곁을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은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는 반증이었을 것이다. 부끄럽기도 했고 다행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지인들은 내 곁에서 완전히 사라졌을까?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내 주변에 있었다. 전과 다른 점은 내 곁에는 두지 않았다는 것뿐. 이제 더 이상은 그들에게까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끌려다니지 않을 뿐이다. 나는 이제는 세상 모두가 아닌 나와 나를 지켜주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확고한 내 중심이 생겼다는 것 감사할 따름이다.



환경은 선택하지 못했지만 내 눈앞에 놓인 상황과 행동들은 다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그 누구의 책임도 물을 순 없다. 지나간 시간들은 변하고자 하는 마음가짐만 있다면 과거의 한심했던 나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자책이 심한 나는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부모님과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어리석었던 나의 과거의 말과 행동들은 무조건적인 나의 탓만은 아니라고, 더 이상은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려 주려 애를 썼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그동안 내가 상상하고 타인을 통해 보았던 모범적인 가정과 부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어난 일을 문제 삼는 태도와 그것을 대하는 삐딱한 마음가짐은 더 이상 나에게는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깨성인이 된 나는 피해의식이 가득 찬 사고방식을 더 이상은 부모님에게 책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어난 모든 상황과 현실은 고스란히 내 선택이었고 오로지 겪어내야 할 나의 몫이므로 내 말과 행동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스스로 책임지며 헤쳐나가는 데 있다고. 스스로가 선택한 중심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세상과 남 탓을 하지 않을 수 있고 세상을 향해 당당하고 덤덤하게 살아낼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며 아로새기며 용기를 기도 .




그동안 울고 흔들리고 깨져 부서진 파편들을 주워 한자리에 모아보니 그건 모두 내가 한 선택들이 아니었다 는 것을 알았다. 엄마였고. 언니였고. 선생님이었고. 아는 이었고. 모르는 이였기도 했다. 언론이었고. 유튜브 속 주인공들이었고. 다신 마주치기 힘들 스치는 사람들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들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좋아 보인다고, 혹은 무지에서 오는 때론 죄의식을 부각하며 주체 없이 맹목적으로 따라한 나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말을 한 것뿐이었고,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한다. 중심이 없었기에 흔들린 마음을 변명하며 구차하게 남들에게 넘겼던 나를 되돌아보며 나도 그들도 완벽할 없다는 사실을. 간절함만 있다면 사람은 언제든 바뀔 있다는 것을. 덕분에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보다 넓어져 인간관계가 굉장히 편해졌고 책으로만 세상을 대하는 건 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세상 속에 뛰어들어 경험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삶이 전반적으로 편안해졌다.


내가 피해 자라며 외치고 다녔던 10년간 가해자라고 느꼈던 엄마가 어쩌면 가장 큰 피해자는 아니었을까. 내가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랑은 전하는 방식이 나와는 달랐던 엄마만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설사 그게 아니라도 더는 서운해하지 않기로 했다. 진실이든 아니든 더 이상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내 삶에 어떤 아름다움을 더할지는 스스로 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 인생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언제 행복하냐고 물을 때 '지금'이라고 답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해졌을 뿐이다. 행복은 빈도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더 이상 멀리서 행복을 찾지 않기로 결심했다.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나에겐 큰 행복이다.


되돌아보니 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들이 참 의미 있고 좋았다. 때론 괴로웠지만, 덕분에 삶이 많이 가벼워졌고 타인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그릇이 조금이나마 커졌다. 내가 행복하려면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말은 정말 진실이었다. 상대방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얹지 않도록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대하고 싶다. 아직은 부럽고 질투 나는 마음까지 조절하는 능력은 미숙하지만 그 감정 또한 곁에 두어 잘 달래 보려 한다. 전보다 담담함이 커지는 걸 보니 아마도 나는 성공할 인물이 아닐까 하며 스스로 추켜세울 여유도 생겼다. 나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땅굴을 파서 휘저어 놓은 뒤 모든 걸 훑고 나와야 편안해지는 사람이 확실한가 보다.


어제보다 오늘이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부서지고 깨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시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앞으로 또 넘어짐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보다 더 단단해지겠지. 내가 한 뼘 더 성장한 것을 보니 고난은 신이 주신 선물이 맞았나 보다. 더 이상 미래의 일을 지어내서 불행의 끝으로 스스로를 내몰지 않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이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해나갈 것이다. 중심을 가지는 사람. 나에겐 또 다른 목표가 정해졌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으니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 든 오고 말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고통을 겪으며 죽어야 하거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겠으나, 죽음의 순간이 오면 조용히 읊조리고 싶었다. 드디어 왔구나, 하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심장 언저리가 들끓는 것 같았다.
부르릉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리는 것 같았다. 생의 의지가 아래로부터 올라왔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언제고 삶을 마감할 때가 오겠으나 그때까지는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죽음이 찾아오면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자신의 세계를 가꾸며 하루의 시간을 채우고 싶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친절하고, 더 많이 행복하고 싶었다. 뜬금없이 운명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생각하며 윤옥은 서서히 차오르는 적의를 느꼈다. <지켜야 할 세계/ 문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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