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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Jan 05. 2024

나의 정체성 찾기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며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배워야 해"

<나의 상처를 아이에게 대물림하지 않으려면/푸름 아빠/한국경제신문>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내가 사는 곳이 싫었다. 가까운 남해로 이사를 해서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다. 사람 냄새를 맡고 싶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한 온기와 인정을 내어주고 싶었다. 집을 알아보고 게스트하우스를 해볼까 고민했다. 손익 계산을 해보니 내가 가진 돈으로 남해에 집을 사거나 게스트하우스를 유지한다는 것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꿈꾸던 감정적인 욕망을 채우기엔 가진 돈이 적었다. 나만의 세상 속에 갇혀 스스로 만들어 낸 외로움에 혹시나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을 모른 채 사람만을 그리워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사람을 만날 때면 앞에서 해야 할 말과 해선 안될 무례한 말을 잘 구별하지 못하였고 열등감이 새어 나올만한 사람들을 마주치면 주눅부터 들었다. 완벽해 보이는 그 사람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연약한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고서 만남을 가졌던 것 같다. 유치하고 치졸하게도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는 마음에 없는 칭찬을 만들어 추켜세우기도 했고 한없이 나를 낮추어 부끄러움에 뒤척이는 날도 덩달아 많아졌다.  


당장 내게 이득이 되는 것은 눈곱만큼도 없는데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 일들이 마음과 행동으로는 도저히 연결되지 않아 삶이 공허하고 초라해졌다. 마음속에서 삐걱대는 어긋남이 지속되자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도 왠지 불편한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피어올라 초조하게 만들었고 두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이 아리송해졌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곱씹다 보니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날이 몇 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남해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나에게 일종의 도피였다.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매 순간 멀미하듯 울렁거리는 마음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어느 곳에 가서 살더라도 똑같은 문제로 부딪힐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겐 부부만이 아닌 두 아이가 있기 때문에 홀가분한 선택이 어렵기도 했다. 꿈만 꾸며하는 후회와 자책은 이만하면 되었다. '그래. 지금 이곳, 이 자리에서 새로운 나로 태어나보자.'라는 생각 했다. 이것이 2023년에 나 스스로 세운 가장 큰 계획이었다.


언니의 남자친구를 떠나보낸 뒤 글을 쓰기가 힘들어졌다는 핑계를 대며 내면의 유일한 탈출구인 글쓰기를 무려 1년이나 쉬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애달픈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산뜻한 연애를 시작한 언니를 만나기도 했고 (산사람은 산다는 말은 옛말이 아니었다.) 조금은 더 강인해진 신랑과 조금은 더 연약해진 나를 만나기도 했으며 삐걱대는 엄마와의 관계도 외줄 타기 하듯 넘어지지 않고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40년 가까이 엄마와 언니의 그늘 밑에서만 살았다. 나에게 스케치된 세상은 모든 존재가 언니와 엄마의 기준으로만 국한되었을 정도로 내 삶 깊숙이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줄 알았고 맞다고 하면 맞는 줄 알았다. "어떻게 그래?"라는 엄마의 한마디와 "봐! 내 말이 맞지?"라는 언니의 한마디가 내 모든 반론들을 잠재워 버렸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뭐가 그렇게도 두려웠는지 잘 모르겠다. 형체도 없고 실체도 없는 말 몇 마디에 크나큰 상처를 받았고(물론 지금도 다르진 않지만) 엄마와 언니에게 상처를 줄까 봐 노심초사했다. 일종의 쇠뇌와 결이 같았다. 고작 네 개의 가시만으로도 호랑이가 두렵지 않다며 허영심을 부리며 무안함을 끝없는 기침으로 무마시키던 어린 왕자의 꽃을 보며 언니를 떠올렸다. 그랬다. 꽃이 하는 말을 절대로 들으면 안 되었다. 나도 그저 향기만 맡았어야 했다.


"네 장미꽃이 그렇게 소중해 진건 네가 장미꽃에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생텍쥐베리>


효심을 앞세운 바리데기 공주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40년을 가족으로 살면서 아무래도 공을 너무 많이 들여서 본전 생각이 났나 보다. 정신과 전문의 전미경 작가님이 쓴 <당신은 생각보다 강하다>에서 어떤 환자가 자신의 생모를 지칭하며 '언니엄마'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럼 우리 엄마는 '오빠엄마'인 건가? '무공감?' 혹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이름은 어떨까?(웃프다) 자식에게만은 공감능력이 전혀 없던 엄마 밑에서 건강한 자기애의 충족이 어려웠던 나는 언니와 엄마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빠 언니보다 네가 제일 낫다'라는 엄마의 넋두리가 내 허영심을 채워준 셈이기도 했다.


 내 인생의 발목을 잡고 바리데기 공주님처럼 살게 만든 무서운 말을 어리기만 했던 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며 살았으니 행여 내 아이에게 하는 나의 말 한마디가 내 아이의 발목을 잡게 만들지는 않는지 이제와 두루 살피게 되었다. 완벽하진 않겠지만 그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과 인식하지 않고 사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과 경험들을 통해 차곡차곡 채운 작년은 나에게 정말 특별한 한 해였다. 내 몸 깊숙이 스며든 엄마와 언니의 무거운 기운을 털어내고 의도적으로 멀리하면서 비워진 그 두 명의 공간에 도전을 플러스 함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3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운동 덕분에 몇 군데 대회에도 참가하게 되었고(댄스스포츠다) 그로 인해 나이와 관계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생겼다.(지난 글을 읽어보면 그간 얼마나 소극적인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주일에 2번 3시간씩 요리 강의를 들으러 다니며 또 다른 인간관계가 생겼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운영위원회도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격주로 급식배식도 참여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가까이 지켜볼 수도 있게 되었다. 작은아이 학부모와 우연히 만나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부부 독서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님들과의 인연, 마음이 울적할 때면 들려서 고민과 삶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공간과 그 속에서 글로만 쓸 수 있는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언니들도 생겼다. 되돌아보니 그렇게 뭐든 자잘한 시도를 많이 했던 한 해였던 것 같다.


책상에 앉아 나만의 세상에 사로잡혀 꿈만 꾸던 내가 현재를 몸으로 부딪혀가며 1년을 꽉 채워 살아가다 보니 고등학교 친구 한 명 만을 남겼던 협소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인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일이 생겨났다. 생각할수록 신기할 따름이었다. 의외로 낯을 가리는 소심한 성격을 지닌 내가 걱정을 최대한 적게 하고(내 성격에 적어 봤자지만) 생각을 달리해 적극적으로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행동하게 했던 단 하나의 마음가짐은 이랬다.


"다가오는 그 누구든 밀어내지 않을 것"


그렇게 내 안에 새겨진 편견들을 지우고 만나려 애를 썼더니 운이 좋게도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나부 터서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떻까?' 하는 마음을 자주 내었고 '입장을 바꿔 본다면'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모든 감정을 나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타인의 마음까지 헤아리려 노력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내 입장에서 라는 말을 자주 쓴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아마도 혼자서는 스스로를 인식할 수 없었던 지점이었을 것이다.) 만남에서 무언가 걸린다고 느낄 때에는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며 나의 열등감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철저히 내가 해석한 주관적인 감정일 뿐이었다는 사실과 비록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었더라도 바꿀 수 있는 힘을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렇듯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알아가고 있는 중인 거다.  


2023년에는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일에만 집중을 했다면 2024년 올 한 해는 나 자신을 지키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연습해 볼까 한다. 인간관계에 의도적인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가식적이더라도 의도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금세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에 한걸음 두 걸음 천천히, 나 스스로가 좋아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처음부터 가지지는 못했어도 꾸준히 찾아 나서면서 나를 알아차리고 미흡한 점을 고치려는 그런 사람. 선천적이 아닌 후천적인 인간, 그게 나라는 사람인 거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 나는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I like me best when i'm with you)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내가 있는 그대로 존재해야 하겠지. 인간관계가 힘들었던 것은 '내가 나답게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된다. 다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나도 다만 그 존재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문장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혹여 앞으로 만날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따뜻한 수용을 받아 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마음 아려하는 일들이 많았던 만큼 스스로에게 너무 긴 잣대를 들이대는 가혹한 일만은 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아직 잘 되진 않지만 말이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너무 긴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은 아니기를.(신랑 미안) 오늘 하루 내가 건 상대의 전화에서 내 이름이 떴을 때 반가운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를 대하는 진정성 때문이었다. 타인을 만날 때 습관적으로 꾸미거나 과장된 진심을 보이는 이들과 달리 그는 나를 대하는데 조금의 가식도 없었다. 다정했지만 굳이 내 호감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온전히 나와 함께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진심 어린 마음을 나누는 것 판단보다는 온 마음을 담아 누군가를 만나는 것 어떤 사상과 지식보다 가치 있는 일이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류시화/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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