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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Dec 26. 2021

나의 말의 무게

어른들의 화용 언어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에서 자기 생각과 다르면 소리를 꽥꽥 지르며 침을 뱉고 문을 걷어차는 아이가 나왔다. 말로서 자기 의견을 표현해도 될 일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혀를 내 두를 정도로 공격적인 행동으로 불편함을 표현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독서량이 또래에 비해 아주 많아 기본적인 어휘 수준이 높은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라도 자기의 생각과 다르면 지나치게 날뛰는 행동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오은영 박사님은 아이에게 화용 언어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다.


話用언어

한자를 보면 (말 화/ 쓸 용)"말을 사용한다"라는 뜻으로 듣는 사람의 수준, 분위기, 흥미도에 따라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용 언어란 상황에 맞게, 상대에 맞게 말하는 것. 상대방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상대방이 잘 이해할 수 있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만 알맞은 발단단계의 화용 언어가 필요한 것일까?

유연하게 살지 못하는 우리 어른들도 화용 언어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이만큼 살아오면서 위의 아이와 같은 공격성을 내비치는 사람들도 종종 보았고,

나조차도 타인이 나와 완전히 다른 의견을 내면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화가 나는 상황도 있었다.

금쪽이에 나왔던 아이처럼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 나에게도 그와 같은 엄청난 공격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38살이 된 아니, 며칠만 지나면 39살이 되는 나는 그동안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상황에 맞게, 상대에 맞게, 상대방의 의도를 스스로 잘 이해하고 내 의도를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했을까?




나의 화용 언어를 생각하며 가장 아찔했던 장면을 떠올려 보면 단연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며 내주장만 펼쳤을 때였던 것 같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와 다른 건 무조건 틀리다고 생각했었던 그때.

유연하지 못하고 강박적인 성격 탓에 타인의 생각을 듣기보다는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바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이 세상에 맞는 말이 어디 있고 틀린 말이 어디 있었을까?

모두 각자가 살아온 개인의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한 주관적인 생각일 뿐일 텐데 말이다. 

거기에 반박하느라 쏟은 에너지를 생각하면 크게 아프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다.


나는 옳다.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옮겨가네. 즉 '나는 옳다'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긍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네. 이것은 완벽한 권력투쟁일세.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인플루엔셜)


애초에 주장의 타당성은 승패와 관계가 없고 나 스스로 내주장을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것.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는 마음들이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만들어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길을 택하는 것이라고.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이 자리에서 생각해보면 그동안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무모한 행동과 말들을 쏟아 냈는지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왜 그간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냈을까? 배우지 못했기에 혼자만의 생각이 전부라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시간을 거슬러 또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빈민가에 속했던 동네 영향도 있었겠지만 아빠가 뱃사람이셨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했다.

거친 바다 위에서 온몸으로 풍파를 겪은 아빠는 배위에서도 땅 위에서도 아빠의 모든 세상 속에서 거친 언어를 썼었고, 야한 농담이든, 거친 농담이든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며 즐거워하셨던 분이셨다.

엄마는 그런 아빠가 늘 불안하다고 하셨다.

사람들 앞에서 친척들 앞에서 불쑥불쑥 웃기려고 상황에 맞지 않은 말을 하는 통에 심장이 쿵쿵하고 떨어지는 경험이 많았다고 하소연하시기도 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결혼을 하고 다시 되짚어 보면 엄마는 모르셨겠지만 그런 아빠와 함께 살다 보니 불안해하면서도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은 참 많이 닮았던 것 같다. (아빠가 욕을 하면 엄마도 참고 계시지 않고 같이 욕을 하셨으니 말이다.)


부모님 두 분 다 자신의 말에 대한 무게와 책임감에 대해 잘 몰랐으니 나도 그게 잘못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친구들과 놀다가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보고 어떻게 하면 웃기는 말이 될까? 연구까지 했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대신 나를 보살피던 4살 많은 언니가 아빠처럼 유독 거칠게 튀는 말이나 웃긴 말을 많이 했었는데 그게 이유였었는지 강해 보이는 언니 주변에는 늘 친구들이 많았고 단연 언니가 골목대장이었다. 친구가 많은 그 모습을 보며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아빠를 가장 닮은 언니의 말투와 언니의 말을 받아치는 동네 다른 언니 오빠들의 말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의 웃음의 대상과 표현이 그렇듯 상대의 약점을 드러내 놀리거나 본인이 그 약점의 대상이 되어 타인을 웃기는 것에 정성을 쏟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커서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다.


학교를 다닐 때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은 늘 인기가 많았고 외로움이 많았던 나는 그게 참 부러웠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러 정리를 해보자면 그때도 두부류의 친구가 있었던것 같다.

첫 번째는. 일방적으로 타인을 이용하거나 약점을 잡아서 공격적으로 웃기려는 친구

두 번째는. 타인이 아닌 자신만을 대상으로 하거나 일상생활의 모습을 흉내 내어 재미있게 이야기하던 친구

(개그우먼 故 박지선씨가 두번째와 닮았다고 한다.)


올바른 상호작용을 배운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후자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전자에 더 가까웠다.

같은 말이라도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게, 요리를 하듯 양념을 첨가했다. 실제 음식의 맛이 양념으로 해 변질되는 것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재미만 있으면 되었다. 나를 봐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이 혐오. 무례. 무시가 스며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무례함이었다.)

귀로 들었어야 했는데 상대가 말을 하고 있을 때 이미 내가 할 말을 머릿속에서 먼저 생각하고 말 허리를 자르며 받아치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던 나는 잘못된 방식을 통해 엄마가 바라는 '말을 잘하는 성격 좋은 아이'가 되려 하고 있었고 '라테는 말이야'라며 외치는 것을 좋아하는 언니의 비슷한 성격을 가진 나라고 착각했던 내가 아닌 누군가만 있었다.

과연 내가 되고 싶었던 나는 누구였을까?

특별해지고 싶은 욕심이 아니였을까?


원래 공부든 운동이든 어느정도 결과를 내려면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네. 그런데 특별히 못 되게 굴어야지 하고 결심한 아이 즉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는 건전한 노력은 외면한채 주목만 받으려고 하지. 예를 들어 수업중 지우개를 던지거나 큰소리를 해서 수업을 방해하는 문제아들이 있지. 그러면 분명 친구들이나 교사들이 주목할거야. 그런자리에서라면 잠시나마 특별한 존재가 되겠지.

(미움받을용기/기시미이치로/인플루엔셜)


오직 재미만을 추구하다 보니 말해놓고도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괜찮을까?' 걱정하며 상대 눈치를 살피는 일이 많았다. 뒤가 남지 않는다면 몰라도 만남 뒤에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을 보니 분명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감지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보다는 주변을 신경 쓰고 살고 있던 때라 답답함은 마음속에 묻어두고 애써 생각하지 않았던것 같다.

그러다 2년 전쯤 내 인생에 크게 터닝포인트를 갖게 한 사건이 하나 생겼다.

운동으로 가깝게 알게 된 50이 훌쩍 넘은 언니가 스치듯 나에게 한말 때문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걸 왜 이야기하니?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였던것 같다.

당시에 생각하기로는 큰 내용이 없는 말 같아 편을 들어준다고 이야기한 것인데 상대의 마음까지 읽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언니뿐 아니라 선생님께도 운동이 너무 힘들다는 말을 장난으로 "안 올 건데 괜히 왔다~"는 식으로 표현을 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다 웃었지만 선생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띵하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한 그때 생각했다.


"그동안 내 성격이라며 스스로 일방적으로 규정지으며 유쾌하게 웃으면서 농담을 하는 동안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지 못했었구나. 나로 인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았겠구나. 내가 개그우먼도 아니고 잦아서 웃길 필요도 없는 일인데 결국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해서 좋은 사람 소리 듣고 싶어서 무례함도 모르고 떠든 거였구나. 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하면서 왜 사람들은 편하게 다가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라고. (당시에 쓴 일기중 한부분이다)


그 부끄러움의 강도는 앞으로 살아온 내 삶을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오래갔다.

아마 이제껏 살면서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주변을 따라하기에 바빴던 만큼 내 마음이 그 말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이 복잡하고 정신없살았을테, 그렇기에 그말들이 내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있을 겨를 없이 바람처럼 스쳐갔을 것이다. 그날 이후 전에는 내가 어떻게 비춰질까에 대한 고민이 컸다면 이제는 그간 상처 받았을지 모를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커졌다. 이제라도 알아서 참 다행이고 '그동안 참 미안했다'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 잘되진 않지만 되도록이면 상대를 위해 귀를 먼저 열어주고 입은 열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문득 '아이가 아닌 우리 어른들은 화용 언어를 잘 쓰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울 때는 고맙다고 말하지 못하고 다른 식으로 돌려가며 표현하지는 않았는지.

미안할 때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다른 방식으로 돌려가며 표현하지 않았는지.

타인의 마음이나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진 않았는지.

그것 때문에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베푼이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중요한 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어른들에게도 화용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

그렇게 하려면 내가 먼저 가슴을 닫지 않고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는 예전보다 조금 단단해진 마음으로 "진심은 통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모든 이에게 나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다. 존중이라는 큰 틀을 잊지 않고 누군가를 대한다면, 예전처럼 재미있거나 웃기진 않더라도. 혹여나 바보 같기도 하고, 싱겁고 심심하더라도 괜찮을거라고. 더이상은 특별하려 애쓰는 내가 아닌, 평범하고 솔직한 내속에 있는 참모습인 나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오늘도 또한번 다짐해 나간다.


"너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해서는 안돼. 그 사람 앞에서 너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없다면 사랑도 우정도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야"

 

꾸밈없고 기본이 탄탄한 담백한 냉면 같은 사람이 분명 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솔직한 사람

어떤 경우에도 음색을 변조하지 않는 사람

그런 심지 깊고 아름다운 사람

고명하나 없는 냉면처럼 나의 일상도 군더더기는 털어내고

담백하고 필수적인 요점에만 집중하고 싶다.

(그러라 그래/ 양희은/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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