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부터 오늘 나의 기나긴 여행이 시작된다. 내 머릿속에서나 마음속에서나 "오늘은 꼭 명상만 할 거야"하고 들어갔지만, 그 공간에 막상 발을 들여놓게 되면 내가 찾던 '에일린 명상'까지 가는 길은 무척 멀고도 험난해진다. 나에게 유튜브라는 세계는 아차 하고 방심하면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곳이며, 자칫 잘못하면 하루를 통으로 망칠 수 있는 여건들이 지천에 널린 세상이다.
어느 날은 검색을 하러 들어갔다가 곧 시선을 빼앗기면서 내가 무얼 하려고 들어왔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또렷하게 정신을 차리지 않은 날에는 명상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그날의 막을 내리기도 한다. 산책을 통해 아침 바다를 보고 마음을 비우며 잔상을 오롯이 저장한뒤 평화롭고 산뜻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과는 다르다. 자본주의의 매운맛이라고 할까. 아침부터 머릿속에 남겨진 잔상들이 잠들기 전까지 나를 괴롭히는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도 있다. 아침에 하는 산책은 나를 지켜내기 위한 시간임을 잘 알면서도 춥다는 이유로 이불을 박차고 나가지 않은 내 게으름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곧장 후회를 하지만 핸드폰이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닌 이상 이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처음부터 소유하지 않았으면 어땟을까? 많이 불편할까? 아니면 오히려 홀가분 하려나? 이건 뭐 인터넷이 안되는 아날로그 폰으로 바꿔야만 해결이 될까?
알고리즘
주어진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 방법, 명령어들을 모아놓은 것. 넓게는 사람 손으로 해결하는 것, 컴퓨터로 해결하는 것, 수학적인 것, 비수학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유튜브 알고리즘
유튜브 AI가 나에게 가장 적합한 영상을 추천. 사용자의 검색 키워드. 관심사. 성향에 따라 얼마나 그 영상에 머무는지를, 자주 시청하는지를 모두 체크하고 분석해 게시물 간의 연관성을 파악해서 관련 동영상을 띄워주는 것.
머리를 가볍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해져 버렸다.
자극에 자극을 더하고, 잘 가다가 곧장 다른 길로 샌다. 또 다른 사람들의 잘 짜인 삶을 들여다본다.
내 인생도 똑바로 살지 못하면서 남의 삶을 들여다보고 비교하는 모습을 보며 앞으로의 내 미래가 또다시 갑갑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쯤 내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본인이 가진 지금의 최상의 것만을 조합해서 방송용으로 알맞게 맞추어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지만 방심하던 찰나에 내 눈과 마음을 흔들어 놓으면 방송용의 그 진실을 분별해 내기는 상당히 어려워진다. 한없이 평화롭기만 해 보이는 그들의 삶과 지금의 내 삶을 놓고 비교하게 되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코앞의 불편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다. 영상의 날짜를 보니 시간이 꽤 지난 영상인데 그 영상들은 마치 오늘.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 생생한 모습이다. 살아있는 사람도, 죽은 사람도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이며, 그 누구도 늙지 않았다. 방식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행복해하거나 한없이 슬퍼한다.
슬퍼하다가도 또다시 미래를 꿈꾸며 엔딩은 늘 행복이다. 보라고 찍은 영상인데 왠지 그 삶을 몰래 엿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렇게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며 급하게 후루룩 영상을 삼킨다. 곧 반쯤 넋이 나가 방학 동안 아이와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의 나 자신과 끝없이 행복해보이는 그들의 삶과 비교를 하고 있다. 나는 1년 전 2년 전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삶은 그때였던 것이지 지금 그들의 삶이 그대로 행복한지 어떤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고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과 시기심이 구차하게도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한국기행. 미니멀 관련. 명상. 걸어서 세계 속으로. 빼빼 가족. 세계는 지금. ebs culture. 댄스스포츠를 구독하고 있다. 자기 계발 관련 영상과 오은영 박사님 육아 관련 영상도 좋아하고 '우와한 티브이' '메디컬 다큐 7 요일' 같은 프로그램은 구독하진 않지만 눈길이 머물러서인지 자주 올라오기도 한다.(이만큼 써 내려가 보니 요즘 내 머릿속이 복잡한 이유를 알겠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에 내 눈길이 꽤 머물렀던 모양인지 '우와한 티브이' 영상들이 부쩍 알고리즘을 통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까?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에 대한 궁금증으로 어느새 나는 그 영상들을 클릭하기 시작했다. 원래 어려운 사람들이 삶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그분들을 응원하려는 마음과 더불어 그 사연으로 나를 돌아보며, 의지를 다지곤 했기에 특별한 계기 없이 보게 된 것이 화근이 되어버렸다.
며칠 전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다. 갑자기 가슴이 무거워지고 식도에 음식물이 넘어가지 않고 걸려있는 것처럼 계속 답답했다. 병원을 갈 정도는 아닌데 일상이 불편했다. 내 생활을 되돌아보기 시작하면서 그 비밀이 밝혀졌다. '이거다. 이거였구나.'
며칠 동안 아침마다 '우와한 티브이'와 '메디컬 다큐 7 요일' 영상을 보게 된 뒤 생긴 일이었다. '우와한티 비'를 보다 보니 알고리즘으로 '메디컬 다큐 7 요일'영상이 내 유튜브 메인에 속속 등장했고, 실제 병원생활을 그린 내용들을 소화시키지 못한 게 문제가 된듯했다. 며칠 보았을 뿐인데 꽤 오랫동안 우울하고 불안했다.
나는 영상을 보며 당장 일어나지 않을 그 고통들을 미래의 나의 모습으로 정해놓고 그림을 그리고 상(想)을 짓고 극복해나가고 있었다. 영상을 보는 순간 나의 내면의 감정이 이미 내가 그 어려운 사람들이 되어 힘든 상황을 헤쳐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아찔했다. 동시에 또 다른 나의 문제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얄팍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 영상들을 보았다는 게 들통나버린것이다.
그동안 나는 자기 위안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보고 공감하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가슴에 담았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라도 작은 관심을 보여준다면 그분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만했다. 무엇이 필요하다고 그분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방송사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나도 내 마음대로 생각했다.
방송사는 상대방이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는 게 아니라 '이럴 것이다'라고 의도를 가지고 접근을 했고 결론내렸다. 나는 내가 주고 싶은 것만 주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분들은 무엇이 필요했을까? 객관적으로 바라보다 보니 영상에서는 그 답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과연 그분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기는 할까?
오랫동안 아빠가 아프셨고, 과거에는 사회복지기관에서 일을 했었다. 중증 환자의 병원생활을 잘 알고 있었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었다. 원래 감정이입이 심한 편인 데다 아빠가 아프시고 난 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예민해졌고, 과거를 회상하는 못된 버릇까지 있다. 영상을 보며 그분들을 위로한답시고 내 과거를 떠올리고 그분들의 모습을 내 현재에 가져다 놓았다. 그 상황을 통해 내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아픔을 나눈다는 핑계로 나를(내 삶을) 위안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될 영상들을 찾았던 것을 보니, 무의미하게 흘러가버리는 밋밋한 지금의 생활이 지겨웠나 보다. 타인의 아픔을 찾아보고 위안 삼고 싶었나 보다. 이런 내 삶도 썩 괜찮아 보이게끔 만들기 위해 그분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 삶이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내가 생각하며 느끼는 고통이라는 것이 그분들에게는 고통일지 아닐지도 모를 일인데 나의 과거를 빗대어 마냥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상 속에는 그 와중에 이미 행복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일상생활이 나보다 조금 불편하다는 이유로, 정해놓은 평범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회적 기준을 들어 그잣대로 그분들을 마주했다. 그리곤 '이만하면 나는 괜찮은 것 같아' 하고 거만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한 분들을 마주하면 오히려 나를 채찍질하며 못살게 굴기도 했다. 저분들도 저렇게 해내는데 사지육신 멀쩡한 나는 왜 이러고 있나 싶은 한심함이 들면서 열등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양쪽 끝 줄을 묶어 이쪽으로 한번 갔다가 저쪽으로 한번 갔다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잔잔한 물에 큰 바위를 던진 것 마냥 갑자기 나 자신이 불안해졌고 미래가 두려워졌다.
내 마음속의 얄미운 룸메이트인 그녀가(샐리로 이름을 지었다) 떠들기 시작했다. '너도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라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지금 당장 돈을 더 많이 벌라고' '아니면 아낄 수 있으면 아껴야 한다'라고 쉴 새 없이 떠든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너에게만 알려주는 방법이니 지금 당장 해보라고 이야기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대비하지 않고 뭐 하고 있냐고' 다그친다.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내 마음의 짐만 얹게 되는 꼴이 되어버렸다. 며칠간 집중한 영상 몇 개가 예민한 나에게 끼친 영향력이 이 정도다.
가볍게 살려고 노력하며 애쓰고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찰나에 '아차' 하면 이런 불상사가 벌어진다.
나는 일어나지도 않을 사건 하나를 발견하고 내 마음속에서 온갖 소동을 만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모래 놀이하듯 상상에 상상을 더하여 주무르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주 우스운 일이다.
지금 당장 5분 뒤의 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판국에 모든 사건 사고들을 나와 연관시켜 미리 시뮬레이션을 하며 어이없게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뒷전으로 밀어냈다. 미리 걱정해서 사건을 만들고 거기에 알맞은 대책을 적은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려 넣고 있었다. 내가 미리 걱정하여 상상하며 쓴 그 시나리오대로 내 인생이 돌아갈 일이 있을까? 내가 미래에 사고가 당할 확률을 계산하는 동안 봄방학이 된 우리 아이들은 유튜브 동영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이 참 아이러니할 뿐이다.
가만히 보니 두려움. 이것이 또 내 머릿속을 잠식해버렸다. 나는 나만의 기준으로 뭔가 내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거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가장 위험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이렇게 머물러있으면 안 돼''너 이거 잘했잖아'하는. 이런 생각들은 단지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거나 나쁘게 만들 뿐이었고, 내 생각들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정말 미미하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자기 전 "내일 해가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내일 해가 뜨지 않을까? 여전히 해는 뜰 것이다. 객관적으로 내가 그분들을 안쓰럽게 바라본다고 해서 당장의 그 시간이 해결될 수도 없을뿐더러 나의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지도 않은 수많은 일들이 계속해서 내 눈앞에 펼쳐질 것이고 겪어 나가야 할것이다. 그것을 쥐고 흔들며 이리저리 모양을 바꾼다고 한들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만일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지금의 순간을 감사하게 즐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심리적 평안을 위해 골몰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 생각을 한다. '권총 강도를 만나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난 갑자기 그런 일을 당하면 정신을 못 차리는데..' 이것이 고통이다. 이끊일 줄 모르는 불안한 내면의 목소리는 고통의 한 형태이다.
우리는 왜 늘 자신을 걱정해야만 할까? 왜 '나' '나의 것'등에 대한 온갖 생각이 허구한 날 끊이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세상을 어떻게 재배치해야 할지를 당신이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살펴보라.
당신은 마음이 편하지 않고 좀 더 나은 기분이 되려고 노심초사하기 때문에 늘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당신이 늘 마음의 평안을 염려하는 유일한 이유는 마음이 매우 오랫동안 편치 않게 지내왔기 때문이다. 사실 당신의 속마음은 너무나 연약해서 거의 어떤 일이든지 당신의 속을 쉽게 뒤집어 놓을 수 있다.
이 고통을 종식시키려면 자신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상처받지 않는 영혼/마이클 싱어/라이팅하우스
당분간은 휴대폰 자체를 멀리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안되면 꺼놓는 수밖에.
술을 끊으려면 먹지 않는 수밖에 없고, 담배를 끊으려면 피지 않는 수밖에 없고, 살을 빼려면 덜먹고 운동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환경. 자본주의. 미니멀한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에겐 미래에 대해 어렴풋이 그려진 상(想)이 있다. 생각해보니 이것 또한 내 것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나의 환상들을 조금씩 떼어다가 조잡하게 붙여놓은 하나의 이미지였을 뿐이었던 것이다.이제 더이상 다른 이들의 삶을 유튜브로 볼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분들의 상(想)이 내 머릿속에 그려지게 되면 그건 더이상 내 삶이 아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은 내가 정하는 것이지 그분들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낼 수 없는 이로운 삶을 대신 살아주는 덕분에 전체적인 내 생활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것은 참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이 내 것인양 다가오게 되어버리면 나는 또 비교를 하고 자책을 시작하게된다.
나는 단순한 진심의 현우 수수처럼 살지 않아도 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도 카슈미르 라다크에 자리를 잡은 외국인 부부처럼 살지 않아도 되고, 산속에 집을 짓고, 전기 없이 사는 자연인처럼 살지 않아도 되며, 자연농을 하며 스님보다 더 스님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최성현 씨 삶을 동경하며 그 용기를 막연하게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면 나는 아직까지 내 역량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삶도 있구나" 이여야 하지 "어. 이거 좋은데"하며 동경하는 순간 나는 나만의 색을 잃어버릴뿐더러 아차 하면 내 그릇의 크기를 과대평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되므로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분들의 삶은 그분들만이 겪어낸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졌고 나는 그 시행착오를 함께 겪어보지 못했다. 오로지 영상속 그 모습만을 보았다. 나는 그분들이 아니다. 나에게 맞는 삶은 스스로 묻고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혹여나 섣부른 판단으로 거르지 않고 곧이 곧대로 따라 하게 될 경우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였으므로 그에 따라 겪게 될 다양하고 많은 일들을 대처하고 해결해나가는데 큰 어려움이 따를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생각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면 유튜브 속의 아름다운 삶들마저도 나에게는 독이 될 뿐이었다.
내 그릇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찾아가는 지금 이 시기에는 뭐든 맹목적으로 따라 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역량을 점치지 말고, 나 스스로에게 꼼꼼히 묻고 답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답은 내가 찾아가야 한다. 우습게도 나는 이런 생각들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다.(실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이 글쓰기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후회가 밀려온다면 과거에 머물고 있는 것이고 두려움이 엄습한다면 미래로 가있는 것이라고 했다. 알고는 있지만 실천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것이 올해 나의 숙제이다.
그동안 외면했던 우리아이들이 내 눈앞에서 놀고 있다. 지금은 이 아이들에게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이제부터 오롯이 가족의 힘만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이드가 있고, 숙소가 예약된 그런 여행이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떤 고난이 우리 가족을 시험에 들게 할지 아무도 모른다. 익숙한 곳에서는 별일도 아닌 일이 낯선 곳에서는 엄청난 일로 다가올 것이다. 알고 왔다. 그 흔한 내비게이션의 안내도 없는 남의 나라에서 한 치 앞을 모르고 나아가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하지 못하니 미물도 알고 있는 내일의 날씨조차 알 길이 없다. 뭐, 한 치 앞을 알고 살았나? 내일을 알고 살았나? 그래, 한번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