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에서 시작해 두 번째 집은 언니 가게에 딸린 단칸방이었다. 그 집에서 임신을 했고 첫 아이를 낳았다. 임신을 한 뒤 이곳에서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떻게든 이곳은 벗어나야만 했다. 마침 첫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 엄마와 같은 아파트 매매가 나왔고 내가 나의 둘째 딸 나이였던 7살때부터 두 번째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에서 나의 가정을 꾸리고 살게 되었다. 시댁도 친정도 기댈 데 없는 당장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빚을 두려워한 나는 가진 현금과 딱 맞아떨어진다는 이유로, 더 나아가 익숙함을 핑계로 잊고 싶은 기억만이 가득한 어린 시절이 있는 이곳으로 나만의 가족을 만들어 다시금 되돌 왔다.
어느새 아파트도 나와 함께 나이를 먹고 32년이 되었다. 지금의 내 나이였을 그때의 어른들 대부분은 나의 엄마처럼 여전히 이곳에 살고 계셨고, 엄마를 포함한 어른들의 평균 나이는 어느덧 일흔이 넘으셨다. 자식들이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기에 가난했던 시절 나를 얕잡아보던 그때의 눈빛들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고 장성한 자식이 사위와 아이를 데리고 근처에 산다는 것만으로 되려 엄마를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30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 기댈 곳 없는 시댁과 친정. 아이를 둘이나 낳은 나의 고민은 늘 한결같았다.
"나 이후의 내 가족들의 삶 속에는 더 이상의 가난은 없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 가난의 되물림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가난의 대물림은 내 아이에게는 전달되지 않도록 내 선에서 끊어내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꾸준히 책을 빌려보았고 서점에서 책을 사고 여러 강의도 보기 시작하면서 부동산, 재테크, 주식등을 공부하며 허왕된 꿈들을 잔뜩 꾸기 시작했다. 어느새 훌쩍 나이를 먹고 정신만은 영글지 못한 채 몸만 커버렸던 나는 되돌아온 이곳에서 그렇게 어린 시절의 결핍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집과 차를 빚 없이 장만하면서 꾸준히 아끼고 모았더니 목돈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간 내 삶 속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난히 내세울 게 없었던 나에게 오롯이 신랑과 내 힘으로만 만든 그 목돈은 내가 느껴보지 못한 우월감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뭐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모호한 개념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이 생겼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시작했다.
두 아이 모두 모유를 먹이고 천기저귀를 번갈아 가며 쓸 만큼 아낀 돈으로 몇 번 보지도 않은 땅을 대출을 껴서 홀라당 사기도 했고 (3년 만에 겨우 팔았다) 앉아서 돈을 벌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큰 사업가를 꿈꾸며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에 눈을 돌리기도 했으며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남들이 다 한다는 주식에도 손을 대어 보기도 했다.(현재 마이너스다)
몇 년을 걸쳐 돌고 돌아 나를 되돌아보니 그나마 돈을 모으는 법은 알고 있었으나 쓰는 법은 굉장히 무지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진정으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늘 헷갈려했고, 세상이 원하는 성공에만 목을 매고 나를 증명하려 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원하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 대신 돈을 많이 벌었다는 주변의 소리만을 듣고 곧이곧대로 믿고 따라 하기 시작했다. 통장에 돈을 넣어놓기만 하면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이렇게 하면 진짜 돈 번다니까. 다 네가 게을러서 그래"라며 다그치는 암묵적인 말들이 나를 흔들며 날카롭게 찔러댔다. 진짜 자산가들은 티비속에 나오거나 책을 내거나 방송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지도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몇 년을 걸쳐 돌고 돌아 경험이 쌓이다 보니 책이든 영상이든 부동산이든 이런저런 화려한 언변을 미끼로 내 돈을 불려줄 것 같던 그들도 다 나처럼 돈을 벌기 위해 소속된 노동자이거나 사업가일 뿐이었다. 돈 공부의 경험을 통해 나를 현혹시키던 그들을 비롯해 정부든 사회든 살아가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할 땐 감정이나 욕망을 앞세우기보다는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굳이 돈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괴롭고 피곤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게으르지 않았다' 지난 가난에 보복하듯 욕망에 눈이 멀었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고 감정이 앞서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으며, 내가 견딜 수 있는 그 정도가 어디쯤인지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알 수 없어 두렵다고 느끼는 내 미래를 안전하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내가 가진 돈의 소비를 통해 내 욕망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풀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물가상승률을 운운하며 현금을 가지고 있으면 손해라는 말에 현혹되어 한심하게도 나만의 스토리를 가진 내 돈의 가치를 한없이 끌어내렸다.
돈을 제대로 모으고 사용하려면 그 누구의 말보다는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도 마음이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했던 나는 재산을 모으거나 불릴 방법을 연구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도 함께 시작했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테크 공부보다 마음공부가 최대의 수확이라 단언할 수 있다. 오히려 돈을 모으면서 나의 진짜 성향을 알았고 내가 어떨 때 가장 행복한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제 나에게 돈이란 현재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지켜주는 수단으로쓰일뿐이지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안감에 휘둘리며 알 수 없는 미래를 저당잡는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내가 지금 현재 누릴수 있는 소소한 행복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일어나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책을 읽고 막 해가 뜬 새벽에 5천원짜리 새거울을 단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하고, 바다를 보며 사색을 하고, 아이들을 챙겨 안전하게 등교 시키고, 월7만원을 내어 즐겁게 춤을 출 수 있는 학원에 가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혼자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도서관에서 보고싶었던 책을 빌려보기도 하고 희망도서를 신청하기도 한다. 깨끗하게 집안 청소를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이따금은 시에서 무료로 하는 필라테스를 가기도 하고, 어린이집과 학교를 마치고 온 아이들을 돌보고 때묻지 않은 웃음을 보고 간식을 챙겨주고, 쫑알거림을 듣고, 퇴근한 신랑을 챙기고, 함께 저녁을 먹고 맥주도 한잔씩하고, 신랑과 사랑을 나누고, 맛있는 야식도 먹고, 가끔 외식도 하고, 앞으로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하고, 좋은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가까운 지인을 초대해서 함께 술자리도 가지고... 글로 열거해보니 나에게 행복은 딱 이만큼이면 되었다. 아직은 어리기에 돌발적인 일이 많은 두아이들을 챙기기 위해서 온전히 집에 있기로 결심한뒤 불쑥 우울증이라는 불청객이 찾아 왔지만 꾸준한 연습을 통해 지금 이자리에서 내가 할수있는 일을 최대한 하면서 누릴수 있는 혜택 또한 최대한으로 누리고자 공부하고 연습했다. 나의 미래가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극도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1억 이후에도 나는 돈을 모으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내자리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너처럼 아무것도 몰라. 그냥 니 갈길가.
-그건 네 생각이고/장기하와 얼굴들
신랑이 월급을 받아오면 일단 통장 속의 돈은 무조건 0을 만들었다.
신랑 몫의 차량비, 휴대폰요금, 용돈을 떼어주고, 나머지 비용은 세밀하게 나누었다.
통장은 생활비/ 세금 통장/ 여행비 및 경조사비/ 예비비/ 청약/ 적금/ 곗돈/ 최대한 쪼개고 쪼개었다.
한꺼번에 넣어놓고 쓰다 보면 돈의 용도를 가늠할 수 없게 되므로 용도에 맞게 쪼개어 그 용도로만 돈을 사용하려 노력했다. 세금 통장에는 내 돈이 아닌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교육비, 카드값, 티브이, 인터넷 요금, 휴대폰, 후원금, 청약 등 들쑥날쑥한 돈을 미리 계산해서 넣어둔다. (모르는 것은 매년 평균치로 계산해서 넣었다. 예를 들면 가늠할 수 없는 전기세, 가스비는 월 사용하는 평균치에서 1-3만 원을 더 넣어 둔다.) 아이들 때문에 인터넷 쇼핑을 많이 이용하는데 반품 시 편리함 때문에 주로 카드를 사용한다. 카드는 무조건 쓸 때마다 세금 통장에 현금으로 꼬박꼬박 넣어 두었다. (3만 원을 카드를 긁는다면 3만 원을 세금 통장에 현금으로 미리 입금시키는 것이다) *있는 현금을 사용하고 되도록이면 카드빚을 만들지 않았다.
생활비는 5주를 계산해서 봉투에 돈을 분리해서 10만 원 정도의 현금을 넣어두고 1주일에 1개씩 봉투를 꺼내어 썼다. 50만원을 빼고 남은 금액의 돈은 통장에 넣어두고 10만 원 이외에 사용되는 돈은 체크카드를 사용하거나 카드를 사용했을 경우 세금 통장으로 카드비용을 계좌이체를 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다.
카드는 내가 가진 돈의 금액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지갑에서 나가는 현금 5만 원은 손이 덜덜 떨리기 마련인데, 카드로 긁는 5만 원의 가치는 깃털만큼이나 가볍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인터넷 쇼핑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니터상의 3만 원은 별일이 아니었지만 내 지갑에서 나가는 3만 원의 현금의 무게는 꽤나 무거웠다. 몇 년 동안 가계부를 썼다 안 썼다를 지속했다. 하루에 1만 원~2만 원씩 끼워 넣고 쓰는 생활비 달력도 사용해보고 돈을 더 쪼개 보았지만 고민해도 쓸 돈은 쓰이게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일단 정해진 돈 한도 내에서 사용하는 연습을 꾸준히 했고, 통장에 100원이 남든 1원이 남든 그 이외 남는 돈은 무조건 저금을 했다. 어쩌다 나오는 상여금은 되도록 쓰지 않고 무조건 저금을 했다. 예비비 통장에 일정 금액을 넣어두고 마이너스통장이 아닌 플러스 통장을 만들어 초과되는 금액을 사용했고 다음 달 월급을 타면 플러스 통장에 돈을 먼저 채워놓고 계산을 시작했다.
우리 집은 7세 9세 아이를 가진 외벌이이다.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아니고 생산직이라 들쭉날쭉한 금액이지만 평균 250-350 사이를 유지한다고 본다.(코로나 이후로는 여의치 않을 때도 많았다) 이 플랜을 통한 패턴을 자리잡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물론 지금도 시행착오를 겪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습관으로 돈을 모아 왔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각가정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카드값이 있다면 일단 카드값을 먼저 청산한 뒤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들 이렇게 살면 궁상맞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궁상맞지 않고 오히려 삶에 여유가 묻어난다. 내 머릿속에 내가 가진돈이 전부 입력이 되다 보니 계획에 맞게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살림도 미니멀해졌고 덕분에 통장도 따뜻해졌다. 1억이라는 여유자금의 든든함 덕분에 어지러웠던 머릿속도 전보다 많이 가벼워졌다.
이 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은 신랑의 공이 참 크다. 결혼을 해보니 아무리 혼자서 끙끙대며 지켜나가려고 해도 배우자와 뜻이 맞지 않았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 같다. 허튼짓하지 않고 나를 전적으로 믿고 맡겨준 신랑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도 중간에 포기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댁의 빚 때문에 큰 고생을 했던 경험 덕분에 신랑이 잘 따라와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결핍이 늘 슬픈 결과만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신랑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은 엘리베이터 없는 3층이다. 대출을 내서 집을 살만큼 집값이 오르는 지역도 아니고, 사실 오른다고 해도 남의 이목에 따라 대출을 내서 좋은 집에 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타기 속에 내 몸을 내 맡기기에는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깨지기 쉬운 불안한 사람이다. 20평의 지금 집을 리모델링을 하고 두 아이를 키우며 4인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과거 나에게는 시어머니라는 큰 함정이 있었다. 우리 힘으로 빚 없이 산 집의 기쁨을 양껏 만끽하고 있었을 때 시어머니께서 집에 처음 오신 날부터 '계단이 많다. 나는 여기 못살겠다'며 비데와 정수기를 찾으셨다. '애들 옷이 왜 그러냐, 그렇게 살지 마라, 돈은 다 때가 있다 아끼지 말고 돈 좀 쓰고 살라'며 늘 못마땅해하셨기에 모진 말들을 견디느라 마음이 참 힘들었었다.(우리는 우리만의 기준으로 이미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데 말이다) 비단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들리는 잡음들은 실로 엄청났다. 친구며, 이웃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비교가 되었고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삶을 우연히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는 우리만 무인도에 갇혀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의 기준을 세워놓고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고 끈기를 더했더니 의구심 가득한 그 눈빛들을 잠재울만한 일들이 나에게도 벌어졌다. 금방이라도 깨질듯한 유리 멘탈인 나도 꿋꿋이 지켜냈듯 그 누구도 용기를 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도 원망했던 불우한 가정환경이 아니었다면 나 스스로 이뤄내기 힘들었을 일들이었을 것이다. 가난이 괴롭고 힘든 일이었기는 했으나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고 원동력으로 삼아 헤쳐나가다 보니 이것 또한 온전한 자립이라는 보답으로 나에게 되돌아왔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떠올려 다시금 생각해보면 다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내가 가난으로 힘들다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들도 있었고 그 와중에 나 또한 알량한 우월감을 맛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그들도 나도 또 다른 타인도 작은 지구별에 발을 딛고 살을 부비며 살아가는 무지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곤 한다. 나는 특이하게도 이런 대목에서 인류애를 곧잘 느낀다.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고 다시 한번 더 나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현재를 살기로 결심한 만큼 나에게 이 돈의 의미는 미래의 개념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든든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안전한 울타리로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제야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 것이다.
막연한 미래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무책임하게 흥청망청 살겠다는 것도 아니다.
나에겐 앞에서 말했듯이 어둠 속에 갇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미리 지어내어 나를 괴롭히는 일따위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공부를 통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보다는 오히려 내가 가진 돈을 잘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돈을 통해 내 생활이 멋스러워지고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큰 마음이 생긴다는 사실도 몸소 느끼고있는 중이다. 덕분에 욕심을부리지 않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베풀고 싶을 때는 시원하게 베풀 수 있는 배포 또한 생겼으니 이처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이제야 아이에게 내 결핍을 쏟아붓는 일을 멈출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말한것처럼 가난의 되물림을 끊어내는 일이 우선이 될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가꾸고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것이 아이들에겐 더 큰 배움이 아닐까 싶다.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수있도록,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헤쳐나가는 모습을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지켜보며 기다려 줄수 있는 내 마음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더중요한일일것이다. 각자의 역량에 맞게 살며 자신의 몫의 책임을 스스로 다 할수있도록 격려하고 지지해주는것이 나의 몫이 아닐까? 아이는 물론 신랑에게도 말이다. 어쩌면 1억이든 2억이든 유산을 남겨주는 것보다 더 소중한 건 믿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이해하고 기다려 줄 수있는 느긋한 마음을가진 사람이 되는것이아닐까 싶다. 내가족이 어려움을 겪을때 곁에 남아 안아주고 위로해주는사람이 되고싶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