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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Sep 29. 2021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동반한다.


집에 있던 차가버섯을 엄마께 드리려고 전화를 걸었다.

귀하다는 버섯인데 우리는 먹지도 않으니 필요한 사람이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신랑을 꼭 챙겨 먹이란다.

"정서방 요구르트에 타서 꼭 먹여라 건강에 좋단다"

"그럼 그럴까?"

이때까진 아무 일이 없었다.

갑자기 엄마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수술 뒤 앉기 불편한 다리 때문에 침대 옮기는 이야기를 하시길래

전날 신랑과 함께 엄마 집에 가서 침대를 옮기면서 집 정리를 해준 참이었다.


"이 세상에 정서방 같은 사람 없다. 진짜 최고다. 정서방 없으면 안 되고,  

어찌 저리 야무지고, 최고다 최고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온몸을 바쳐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에서 갑자기 울컥 화가 났다.

언제 나에게는 저런 모습 한번 보여준 적 있었나?

돈이나 가져다줘야 저런 모습을 보였을 테지 싶었다.

늘 한결같이 어쩜 저렇게도 남의 편에 서서 입 발린 소리를 할까 화가 났다.

하도 얄미워  "잘하고 고생한 건 아는데 내가 가자고 했다니까" 라며 툭 던졌더니


"그건 모르겠고 사랑한다 전해라. 그런 사위가 어딨니.

나는 정서방 제일 사랑한다. 일등으로 사랑한다. 니는 2등이다."


하.

그러곤 전화를 끊으면서 시장에 가서 누룽지랑 깻잎을 사다 달란다.

딸에게는 그렇게도 인색한 칭찬과 당연한 일들이

매번 어김없이 신랑에게는 황송한 일이 되어버린다.

왜 똑같은 일을 해도 내가 하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문득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흔 작가) 책 속의 내용이 떠올랐다.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수반한다.

나의 게으름은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어 누리는 권력이다.

나는 오늘 얼마나 많은 노동에 기대어 편리함을 누렸을까.

얼마나 많은 차별 속에서 모른 척 편리함을 누렸을까.


참 사람이 이렇게나 못됐다.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일은 사랑까지 운운하며 치켜세우면서,  

내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은 왜 엄마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이런 대단한 남자를 모시고 사는 것을 영광이라 생각하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린 시절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빠에게만 특별히 대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듯이  

오빠 대신 신랑으로 대상만 바꾸어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네가 알아서 잘 모시라는 뜻 같았다.  

신랑의 친어머니가 아니라 나의 친어머니인데 말이다.


엄마 바로 옆에 살면서 하루에 몇 번씩 하는 일들

'병원 태워달라. 은행같이 가달라. 옷 사러가 야한다. 세금 내달라. 시장 봐달라.

친척 온단다. 선물사 야한다. 인사드리러 가자. 택배 보내라...'

엄마가 당연시 여기며 나에게 시키는 심부름들은

엄마에게는 밥 먹고 물 마시듯 일상적이고 별것 아닌 일에 속했다.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해주지 않으면 그 즉시 다음 타깃인 언니에게로 넘어가는 것.

그걸 알기에 싫은 일도 내가 꾸역꾸역 해내고야 만다.

그 와중에 오빠에게는 자식 된 도리로 불리는 그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주지 않는다.

혜택은 가장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 낮은 자존감은 여기서 비롯된 것 같다.

쓸데없이 태생의 문제까지 끄집어내어

스스로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억울하고 억울했다.

처음이 아니라 늘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쌓이고 쌓인 감정이 터져 나와버렸다.

과거에도 서운한 감정에 종종 따지기도 했으나 다 소용이 없었다.

엄마에겐 속 좁은 막내딸이 하는 투정에 불과했으니까.

더 이상은 이렇게 슬렁슬렁 넘어가기 싫었다.

엄마가 살아 계실 동안 계속 이런 방식으로 살다가는

과장을 좀 보태어 내가 미치지 않을까 싶었다.

 

내 아이들에게 내 신랑에게 이  나쁜 기운이 다 전달될 것 같았다.

"1 화살은 맞아도 2 화살은 쏘지 말자"

이 감정 그대로라면 계속해서 2 화살을 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더 극한 상황이 오고야 말 것 같은 기분이 었으니까.


그제야 나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지금 상황이 무엇인지.

바뀔 수 있을 것인지.

바뀌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지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서로가 행복한 길인 것인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내 삶의 우선순위가 뭔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내 마음속의 고민들을 꺼내어 나열하고는

다시 하나하나씩 따져보기 시작했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두 설명할 순 없지만 염려했던 것보다는 금세 결론이 났다.

지금처럼 엄마가 원하는 일만 해주었다가는

나중에는 더 큰 화가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운한 마음을 가지런하게 정리를 한 뒤 엄마랑 연락을 끊기로 결심을 했다.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내 삶이 더는 견디지 못할 터였다.

나는 내 아이를 키워내야 하고, 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언제까지 엄마의 말 하나하나에  내 인생이. 내 기분 따위가 좌지우지되는 게 싫었다.

더 이상은 엄마의 한마디의 말과 작은 몸짓만으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거나 그 속에 있는 나를 데려와 고통받기 싫었다.


결정은 했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고민이라 결심한 그날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섣부르게 말해봤자 거센 비난을 받을게 분명하기에

일단 당분간은 피해서 지켜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뒷날부터 꾸준히 전화가 왔다.

분명 심부름이었다. 해주기 싫었다.

오만하지만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단지 나를 낳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마에게 모든 혜택이 노력 없이 돌아가는 것조차 싫었다.


이 세상에는 당연한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작거나 사소한 일들 모두 다 그 사람의 시간과 배려와

노력이 들어간다는 걸 알았으면 했다.

(그걸 알기에 나는 늘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한다)

그걸 하찮게 여기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며 나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 세상엔 당연한 건 없고, 엄마가 당연하게 여길 만큼 나를 보살펴주지도 않았다는 사실도 큰 부분 차지했다.


우리 아이들과 신랑은 나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만큼의 책임을 다해야 하지만

엄마가 나를 낳은 건 나의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만은 내 선택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에 따른 죄책감이나 책임도 다 나에게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 어떤 몫의 무게도 다 감당해낼 작정이었다.

타인의 시선, 친척들과 가족들의 시선 따위는 무시하고 싶었다.

그냥 이번만큼은 나로 살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큰아이 생일이었고,

의례행사 때마다 언니 가게에서 모여 밥을 먹었기에

하나둘 모여 생일 축하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손자 생일일인데  노래만 불러주고 가면 어디 덧 이날까?

그 와중에도 엄마는 자기가 속이 안 좋은데 음식을 보면 먹고 싶을 것 같다며

노래 한 소절 부르지 않고 미안하다며 그냥 집에 가버렸다. 심지어 집까지 태워달란다.


물론 나는 태워주지 않았고, 결론은 그날 확실히 난 것 같다.

그날 밤에도 하도 전화를 해대길래

"나 앞으로는 엄마 딸 안 할 거야. 이런 일에 전화하지 마세요"

라며 문자를 보냈다. 물론 답이 없었다.

대신 조카를 시켜서 전화가 왔다.

"고모, 고모가 전화를 안 받는데. 할머니가 요구르트 값 좀 내달래."

며칠째 전화를 안 받았는데 내 안위를 묻거나, 화가 많이 났는지를 묻는게 아니라

요구르트 값을 내달라는 말을 꺼내는 모습에서 내가 내린 결정이 '참 잘한일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조카에게는 표시내기 싫어 마지못해 봉지를 받아왔지만 요구르트 이모 전화번호를 크게 써넣고는 엄마에게 다시 되돌려주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다.

사과를 위장한 비난 편지였다.

10대도 20대도 아닌 40대가 다되가서 그까짓 것 가지고 질투나 하냐는 식의 비아냥 거림이었다.

신랑이 행운의 편지라고 놀려댔다.

생각해보니 정말 행운의 편지였다.

나의 엄마라는 존재도 내가 어릴 때 받았었던 행운의 편지와도 같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내 속마음을 꺼내보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내 할 말을 하고 싶었다.

7장의 분량의 답장을 했다.

이 편지를 받고 엄마 스스로가 되돌아본다면 좋은 일이고

그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 용기도 없이 저지른 일이 아니기에 씩씩하게 속마음을 다 써버렸다.

공지영 작가의 책을 빌어 힘을 얻으면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작가의 글이다.


친구가 너 싫다고 하니? 세상에 또 친구가 될 사람이 많다.

더 많이 너를 좋아하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마음속으로 불러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더 멋진 방법도 있단다.

너는 그냥 너의 말을 하고 그 자리에서 나가는 거야.

그래서 득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일이고,

아니면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고 생각하는 거야.

엄마가 나이 들며 고통에게 배운 건 이런 거였어.



엄마에게 받은 상처를 아이에게 돌려주지 않으려는 그 마음 하나로

여러 책들을 접하면서 예전보다는 객관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용기와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방법을 조금씩이 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껏 에둘러서 좋게 좋게 이야기하는 방법만으로만 세상을 살았다면

이제는 내가 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내입으로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났다.


나에게 이런 편지를 받고 나서의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채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

나는 앞으로도 나 자신과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므로

짧은 찰나의 순간인 이삶을 매번 그냥 흘려보낼 순 없다고 생각한다.

상흔이 크게 남더라도

그 과정이 매우 아프더라도

드러내고 도려내고 깎고 다듬고 해서

버릴 건 버리고 붙일 건 다시 붙여야 할 것이다.


이번일은 나도 엄마도 살면서 한 번은 스스로가 깨달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깨닫는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 발전된 삶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그 사실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

그 누구도 엄마에게 말해주지 않아서, 스스로가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동안  몰랐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일의 해는 다시 뜰 것이다.

오만하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예전보다는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현재를 견디며 이 순간을 즐기며 살아가고 싶다.

나도. 엄마도 그동안 강한척을 하며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들을 내뱉기도 했지만

이일을 계기로 서로가 한 발 더 나아가는 모습이면 좋겠다.

부디.


자네는 지금까지 자네의 생활양식이 뭔지 몰랐을 거야. 어쩌면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조차 몰랐을 테고.

물론 태어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지금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 전부 내가 택하진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것들은 꽤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 불만도 있을 테고, 다른 사람을 보고 "저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싶었는데" 하며 부러워하는 마음도 있을 거야.

하지만 거기서 끝내서는 안 되네. 문제는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 있네.

자네는 지금 여기에서 생활양식을 알게 되었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네 책임이야.

여태까지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것도 모두 자네 판단에 달렸지.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지음/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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